시끌벅적한 상가.
왠지 평소보다 좀 더 활기 넘치는 상가에 푸른 빛을 띄는 흑발의 한 소년이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단순한 산책 정도 인지, 진열되 있는 물품들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2블럭정도 걸었을까. 크로노는 평소와는 다른 상가의 분위기에 약간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길거리가 달라 보이는데....'
달라보이지만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알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역시 크로노라고 할까..... 고민해 봤자 알아내지 못할거라 생각해 머릿속의 생각은 단숨에 정리되어 더이상의 무의미한 사고를 하지 않았다.
약간은 무표정으로 마저 자신의 산책을 재촉하고 있자 건물의 귀퉁이에서 익숙한 갈색머리가 찰랑거렸다.
"어이~ 나노하!"
"아, 크로노군!"
나노하는 예상치 못한 친구를 만난 반가움 때문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우면서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는 도중에 아무것도 없는 길에서 휘청여 크르노의 심장을 철렁하게 했으나 뭐가 좋은 건지 연신 싱글거리는 얼굴만은 변하지 않았다.
친구의 덤벙거리는 행동에 남몰래 한숨을 한번 크게 쉰 크로노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쇼핑중인가?"
"응! 내일이 그날이니까!"
미소가 더더욱 커지며 대답한 나노하의 말에 크로노는 제대로 따라가질 못했다.
그날이란 뭐지?
나노하의 부족한 대답에 좀더 정보를 얻기 위해 말을 하려던 순간 먼저 얘기해 버린 나노하에 의해 크로노의 말은 목구멍에서 막혀버렸다.
"아, 크로노도 그거 사려고 나온거야? 그럼 나랑 같이 둘러보자!"
"아, 저기 그러니까...."
나노하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거'란게 도대체 뭔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크로노는 어느새 나노하한테 붙잡힌 팔을 어색하게 떼어놓으며 왠지 들떠있는 나노하를 달랬다.
"나노하, 들뜨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하는 '그거'란게 뭐야?"
"에?"
진지하게 묻고있는 크로노의 표정에 나노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몇초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예상 외의 질문을 한것일까?
나노하는 머릿속에서 정보의 정리가 되지 않는지 눈만 뻐끔 거렸다.
"저기 크로노군. 정말로 모르는 거야?"
어째선지 크로노의 눈치를 살피면서 나노하는 조심스럽게 되묻고 있었다.
크로노는 당연하게 고개를 크게 끄덕여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나노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엄청난 속도로 크로노의 앞까지 바짝 붙여왔다.
"에에~ 거짓말! 크로노군, 내일 무슨날인지 모르는 거야?"
"모르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게....."
"말도 안되!"
눈앞에서 터져나온 고함에 크로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 졌다.
오랫동안 눈앞의 소녀와 알고 지냈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생소했다. 알지 못하는 친구의 모습에 크로노는 적잖이 당황하며 잔뜩 흥분해 있는 나노하를 달래기 위해 버벅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거'란게...."
"크로노군! 저번달 에이미씨한테 초콜렛 받았어?"
"응? 초콜렛?"
여태까지의 대화와 전혀 상관없는 주제의 등장에 크로노는 의아해 하면서도 성격때문인지 나노하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 위해 착실히 생각에 잠겼다.
에이미와의 수많은 추억중에서 나노하가 원하는 기억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열심히 뒤적였다. 그러자 얼마 안가 크로노의 명석한 두뇌에 하나 걸리는 기억이 바로 생각났다.
"아아... 그러고 보니 한달쯤 전에 초콜렛을 받았었지... 내가 별로 단건 안좋아 하는 데도 한보따리로 줘서 곤란했었어."
그때 에이미의 이상한 행동때문에 크로노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잘 주지도 않던 초콜렛을 어째선지 그날따라 엄청나게 줬었다. 너무 많아 다른 사람한테 나눠 주자 왠지 표정이 우울해져선 왜그러느냐고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도 않고.
결국엔 그 많은 초콜렛을 혼자 다 먹느라 꽤나 고생했었다.
힘겨운 지난날을 생각하자 속이 안좋아 졌는지 크로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배나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혹시 1년 전에도 받지 않았어?"
"1년?"
자신의 대답으로 끝날줄 알았던 초콜렛 이야기가 아직도 안끝났는지 나노하는 초콜렛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확실히 1년 전에도 1달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것 같기도 하다.
활발한 평소와는 다르게 우물쭈물 거리면서 손에 들려있는 것을 건네주기에 뭔가 하고 찬찬히 살펴봤지만 눈에 보이는건 평범한 초콜렛.
예상과는 다른 물건에 대한 생각이 표정에 나왔는지 몇대 때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어째서 비슷한 시기에 그렇게나 많은 초콜렛을 줬던걸까.
크로노는 문득 스치는 의문에 머리를 갸웃 거렸다.
"응. 있었던것 같은데. 초콜렛."
"그럼 초콜렛 받고 답례는 했어?"
"답례라니...."
초콜렛을 받고 답례를 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초콜렛이 귀한거였나.
뭔가를 받았으니 그에 따른걸 줘야 한다는건 알겠지만 뭔가 다른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답례라고 할까. 나도 에이미한테 먹을거나 작은 선물같은건 몇번 하는데..."
"크로노군 바보!"
"뭐, 뭣?!"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친한 친구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은 크로노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별로 잘못한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크로노는 바보라고 들은 억움한 때문에 억양이 조금 높아져서 계속 바보,바보라고 하는 나노하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내가 왜 바보라는 건데? 뭐야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설명좀 해달라고."
"흥, 에이미씨가 불쌍해."
"거기서 또 왜 에이미가 나오는 건데?"
아까부터 나노하를 따라 갈수가 없다. 뭔지 설명을 해줘야지 알것 아닌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아무런 설명없이 천하의 나쁜놈이 될것 같은 기분에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나노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야? 설명을 해줘야 알지."
"크로노군, 발렌타인데이란거 알아?"
"발렌타인데이?"
어디선가 들어본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은 단어의 울림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익숙하지만 생소한 기분. 지구의 어떤 날 이란것 까진 대강 유추해 볼 수 있겠지만 더이상은 무리였다.
"아니, 잘 모르겠어."
크로노는 솔직히 지식의 한계를 인정했다. 여기서 괜한 오기를 부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척 하는건 크로노의 성격이 아니었다.
"바보."
"윽."
하지만 솔직한 태도에서 돌아오는건 나노하의 싸늘한 대답.
괜히 모른다고 말했나 하고 살짝 후회가 밀려왔지만 가만히 나노하의 다음얘길 기다리기로 했는지 크로노는 얼굴을 구기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발렌타인데이란건 2월 14일. 그날 여자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렛을 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날이라구!"
"초콜렛에.. 고백?!"
대, 대체 나노하가 무슨말을 하는거야?!
그, 그러니까 한달 전쯤에 에이미가 초콜렛을 줬고, 그날은 발렌타인데이고, 그리고 그건 고... 고....
우아아아악! 더이상은 말하기 힘들어!
"어때? 대충 알겠어?"
"으, 응...."
나노하는 팔짱을 낀채 곁눈질을 하며 크로노를 흘겨보고 있었다.
크로노는 이해한 시점에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여서는 터지기 일보직전. 항상 냉정, 침착한 크로노에게 있어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에 아마 이곳에 크로노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병원에 신고하자고 난리를 치지 않을까?
"그리고 발렌타인데이에서 한달 뒤인 3월 14일이 화이트데이. 바로 내일말야. 이날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사탕을 주면서 고백하는 날이라고."
"나, 남자가.... 고백..."
나노하의 추가 타격에 터지기 직전의 크로노의 얼굴에선 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하, 하지만 난 그게.. 에이미를 딱히 좋아하는건...."
"응? 무슨말 했어?"
"아, 아니........"
어찌어찌 정신을 차리고자 반격을 시도한 크로노의 말은 나노하의 입은 웃고있지만 눈이 웃고있지 않은 무시무시한 표정 앞에 힘없이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못버렸는지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중얼 거리는 크로노를 못본체 하며 나노하는 축 쳐져 있는 크로노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러니까 크로노군도 화이트데이때 사탕 줘야지."
"..........응."
작지만 긍정을 뜻하는 크로노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나노하는 살짝 웃으면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덕분에 자신보다 어린 여자한테 질질 끌려가는 상태가 되었지만 머릿속의 이런저런 혼란으로 크로노는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발을 움직였다.
"에이미씨는 뭘 좋아해?"
"글쎄... 단건 다 좋아하는데. 사탕보단 초콜렛을 더 좋아할걸?"
"그래? 그럼 초콜렛으로 하자."
"하지만 화이트데이는 사탕을 주는거 아냐?"
"그렇긴 한데... 별로 꼭 그렇다고 정해진건 아니니까. 이런건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하아...."
마음이라....
꽤나 그럴싸한 말이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굳이 무슨무슨 날을 따지는건 의미가 없는게 아닐까?
혼란이 조금은 가셨는지 혼자 조용히 태클을 걸었지만 역시 명석한 크로노는 입밖에 내질 않았다.
"그런데 나노하는 뭘 사려고 온거야? 나랑 어울려도 괜찮아?"
"응? 아아, 응 상관없어. 나도 페이트짱한테 만들어줄 초콜렛 사러 온거니까."
"페이트?"
초콜렛을 사러온게 사실인지 나노하의 손목에 걸려있는 속이 비쳐보이는 비닐봉투 안엔 초콜렛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두개정도 들어 있었다.
"근데 왠 초콜렛?"
"사실 발렌타인데이때 내가 본국에 일이 있어서 페이트짱한테 초콜렛을 못줬거든. 며칠 지나서 주긴 했지만."
"그래서 발렌타인데이 대신에 화이트데이로?"
"응. 내용물은 초콜렛이지만."
부끄러운 건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는 나노하의 얼굴은 양 볼이 발갛게 변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노하와 페이트는 사이가 좋은것 같다. 가끔씩 도가 지나치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일이겠지.
크르노는 자신의 동생이랑 친하게 지내주는 눈앞의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게 오빠 마음이라는 걸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어색했지만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자, 그럼 얼른 사서 우리집에 가자! 내가 만드는거 도와줄게."
"만들다니? 언뜻 보니까 완제품도 파는거 같던데."
"안돼! 여태까지 못준만큼 정성들여서 준비해야지!"
"하지만 난 그런건 만들어 본 적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하, 하지만."
"자, Let's Go!"
"나노하 잠깐!"
이미 페이스를 올려버린 나노하를 향해 무의미한 절규를 하는 크로노는 역시나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나노하에게 끌려가 버렸다.
통, 통, 통- 부엌에서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도마를 두들이는 부엌칼은 칼이라는 섬뜩한 단어에는 어울리지 않는 즐거운 동작으로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도마와 칼의 합주소리에 이어 약간 위쪽에서 작은 콧노래가 들려왔다.
요리를 하는것이 기쁜지 얼굴엔 미소를 띄우면서.
"엄마, 오빠가 어디있는지 아세요?"
부엌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계단에서 금발머리의 소녀가 걸어오며 소리쳤다.
페이트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린디를 향해 걸어갔다. 예전이라면 크게 말하면서 걷는건 하지 못할 것 같던 소녀였으나 시간이 흘러 한결 유연해진 페이트였다. 사랑스러운 딸의 작은 변화에 미소를 띄우면서 린디는 상냥하게 말했다.
"글쎄... 잠깐 산책하러 간다고 나갔는데 아직 안왔나 보네. 곧 저녁식사 시간인데."
"그런가요."
결국 크로노의 행방은 모른다는 거였다.
전에 우연히 크로노의 방에서 본 책을 읽어도 되는지 물어보기 위해 크로노를 찾은 거였지만 이렇게 된다면 다음에 읽어야 겠다.
허락없이 읽었다고 화를 낼 크로노는 아니었지만 이런 작은 에티켓은 지키는게 좋겠지.
페이트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몸을 돌려 부엌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아, 크로노라면 나 밖에서 봤는데."
"알프가?"
작은 어린아이로 변한 알프가 어디서 얻었는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있었다.
우물거리는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졌는지 페이트는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상가에서 봤어. 나노하하고 같이 있던데?"
"오빠하고 나노하가 같이 있었어?"
"응!"
별일이네. 오빠하고 나노하가 같이 있다니.
같이 있는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둘이서만 만날 사이도 아니었기에 의외였다.
페이트는 눈썹을 까닥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밖에서 우연히 만난걸까?
"근데 둘다 얼굴을 빨갛게 하고 있던데? 그러고는 나노하가 크로노를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어."
"응? 얼굴을 빨갛게?"
알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예상 외의 말에 페이트는 마음이 쏠렸다.
어째서 둘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같이 있었던 걸까. 어째서...
대화에 나노하가 나온 시점에서 사고가 둔해진 페이트는 알프의 발언으로 급속도로 기능이 쇠퇴해 가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었지만 페이트는 보통 사람들 보다 심하게 사고가 흔들려 갔다.
잘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들어 무심히 집안을 살펴보고 있던 중에 달력이 페이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퍼뜩 어느 생각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오늘은 13일, 내일은 14일. 즉 화이트데이. 그렇다면 설마 나노하가 오빠를.... 아니, 아냐. 그런일은... 하지만 설마가 사람잡는다기도 하고.... 아냐. 화이트데이는 내일인데 왜 오늘 만나겠어. 산책하던 오빠가 우연히 나노하를 만난거 뿐이야. 근데 얼굴을 붉히고선, 그렇단건 둘이 뭔가가 있다는 건데.. 아니, 딱히 뭔가가 없어도 얼굴정돈 붉힐 수 있는 거잖아. 이유도 없는데 얼굴을 붉힐리가 없어! 그래도, 혹시.. 하지만... 아냐, 그래도 착각이면....
갖가지 표정으로 이리저리 변하는 페이트의 얼굴을 알프는 감상하고 있었다. 그저 재밌다- 란 생각을 하면서.
"그럼 전화라도 해보는게 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에이미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역시나 연장자의 연륜이랄까. 손쉬운 방법을 제시하고는 또다시 어디론가 휘릭 사라져 버렸다. 에이미도 크로노를 좋아할 터인데 이정도의 사건으로는 아무 지장도 없나보다. 페이트는 그런 에이미의 행동에 작은 존경심을 느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면 전화를 해 확인해 보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간단한걸 생각해 내지 못한건 결코 페이트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남들에 비하면 두뇌는 명석했고 결단력, 행동력 모두 뛰어나니까. 단지 나노하 한정으로 페이트는 자신의 장점을 마음껏 활용하지 못하는것 뿐이었다.
페이트는 손을 재빨리 움직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찾고있던 휴대폰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몸에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방안, 책상 위에 고이 놓여져 있을 휴대폰을 생각해 냈다. 뛰다싶이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다. 정면에 보이는 책상을 향해 다가가자 반듯하게 놓여있는 휴대폰이 보였다.
페이트는 단축번호를 눌러 간편하게 크로노에게 통화를 걸었다.
뚜루루- 하는 신호음이 울린다. 하지만 신호음이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끝내 자동메세지로 넘어갈 때까지 크로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차례 더 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일부러 페이트의 전화를 피하는지 아님 못받는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페이트는 초조해졌다.
발을 두어번 바닥에 툭툭치고선 고심한 끝에 나노하에게도 전화하기로 맘먹었다.
단축번호를 누르자 아까전과 같이 간편하게 통화음이 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수화기 건너편에서 나노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왜 안받을까....."
한명이라면 모르겠지만 두명다 안받으니 초조함은 엄청난 기세로 페이트의 몸을 잠식해 갔다. 진정하지 못하고 두리번 거리는 페이트는 주인없는 강아지 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나노하 집에 걸어볼까...."
휴대폰을 열었다. 하지만 망설여 졌는지 페이트는 손가락을 움직이질 못했다. 나노하집에 걸었는데 크로노도 같이 있으면 어떤 반응을 하면 좋을까.
페이트는 손가락을 번호판 위에 올려놓았다 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랬을까.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페이트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면서 번호판을 꾹 눌렀다. 그러자 익숙한 신호음이 들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타카마치 입니다~"
"아, 미유키씨."
"페이트짱?"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유키는 오랜만에 들은 페이트의 목소리가 반가웠는지 한껏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잘 지냈어?"
"네. 미유키씨는요?"
"응,응~ 나도 잘 지내지~"
페이트와 미유키는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은뒤 미유키의 잡담으로 넘어갔다.
남의 대화를 잘 끊지 못하는 페이트로서는 미유키의 말을 계속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어색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상대해 주자 어느정도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미유키가 그제서야 자신이 전화한 목적의 인물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 나노하짱 바꿔줄까?"
"네, 부탁드릴게요."
"응, 잠깐 기다려봐~ 나노하짱! 페이트짱 전화!"
수화기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소리치고 있겠지만 수화기 건너편으로 외치는 목소리가 다 들려왔다.
언제나 기운이 넘치는가 보다.
외침이 있은지 십몇초 후에 나노하가 왔는지 나노하와 미유키의 잡담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페이트짱 전화. 아, 크로노하고는 잘 되가?"
"응, 그럭저럭?"
자, 잠깐!
지금 누군가의 이름이 들렸던것 같은데..!
걱정하던 일이 점점 현실이 되는것 같은 상황에 페이트는 수화기 너머로 소리칠뻔 했지만 어떻게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아내고 있었다.
"페이트짱, 전화했어?"
"으, 응. 저기 지금 크로노랑 같이있어?"
"어떻게 알았어? 크로노군 바꿔줄까?"
페이트는 천진한 나노하의 물음에 작게 대답하고는 묵묵히 기다렸다.
감이 멀지만 나노하의 외침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로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페이트?"
크로노의 목소리는 어쩐지 어색하고 당황하는 듯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들키면 안될것 같은 분위기가 묻어있는 소리에 페이트는 전화를 하기 전보다 더 초조해져 갔다.
"나노하집에 있었던 거야?"
"아아... 뭐, 그렇게 됬어."
"알프가 낮에 오빠가 상가에 나노하랑 같이 있는걸 봤다고 했는데."
"뭐?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뭐가 그리 당황스러운지 크로노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아무리 당황하더라도 침착하게 있던 크로노였는데 평소 보이지 않던 일면을 보여주니 페이트는 안정되질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안좋아 지는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저 우연히."
"크로노군! 빨리 와봐! 여기 이렇게 해놓고 가면 어떡해!"
"아, 알았어! 미안, 페이트. 잠깐만.."
"에, 오빠?"
크로노는 나노하의 외침에 페이트의 말도 듣질 않고 다급하게 수화기를 탁자에 올려놓고 떠나버렸다.
그렇게나 나노하가 중요한가? 동생의 볼일을 제껴버릴 만큼?
탁자위에 놓은 수화기는 꺼지지 않고 멀리서 들려오는 나노하와 크로노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페이트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크로노군. 좀더 상냥하게 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분명히 나한테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하지만 이런거 처음이기도 하고..."
"안돼! 마음을 담아서 해야지. 이제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거잖아? 그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돼."
"그렇긴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데 상대방이 답해주지 않으면 무척 슬플거야."
"아, 알겠어! 열심히 할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나노하와 크로노의 대화는 페이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대화 중간중간에 들려온 어떤 단어들이 페이트의 가슴과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생각을 계속하다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거 같았다. 그리고 대화를 더이상 듣기도 힘들었다.
페이트는 고개를 숙인체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몇번은 와봤지만 그다지 익숙하지 않는 나노하의 집구조를 두리번 거리면서 나노하의 목소리를 따라 크로노는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목표로 하던 부엌은 금새 눈앞에 나타났다.
"왜 부른거야?"
크로노가 다급하게 다가가자 나노하는 어째선지 볼을 부풀리고선 불만어린 시선으로 크로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만들고 있던 초콜렛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크로노군. 좀더 상냥하게 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분명히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나노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크로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초콜렛이 상당히 제멋대로 여러모양의 틀속에 들어가 있었다.
아니, 쳐박혀 있다고 말하는게 좋을까.
여기저기 흘러나오고 묻어있어서 처참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건거 처음이기도 하고..."
"안돼! 마음을 담아서 해야지. 이제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거잖아? 그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돼."
"그렇긴 하지만..."
나노하의 발언에 크로노의 얼굴은 상가때처럼 또다시 붉어졌다.
상가에서 나노하와 만나 쇼핑을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보니 크로노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있어 에이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던 크로노의 마음. 그건 다른사람들이 본다면 당연히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알지못하고 어영부영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노하 덕분에 간신히 깨달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을.
그 사실을 알았을때 크로노의 상태는 가관이었다. 가만히 서있어서 엄청난 속도로 말을 더듬으며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으니까.
머리는 명석하지만 연애쪽으로는 완전히 죽어있는 크로노는 그렇게 한동안 패닉상태였다.
크로노의 그런상태를 나노하가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집에 데려온게 1시간 전. 집에 와서도 안정하질 못해 바로 초콜렛 만들기는 하지 못하고 또다시 시간을 지체하고 겨우 초콜렛을 만들기 시작한게 30분 전쯤이다.
크로노는 그사이 어느정도 안정되었는지 착실히 나노하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데 상대방이 답해주지 않으면 무척 슬플거야."
"아, 알겠어! 열심히 할게!"
풀죽어 연기하는 나노하에 크로노는 어쩔줄 몰라하며 초콜렛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노하가 저런 행동을 할때마다 크로노는 에이미가 떠올라서 곤란했다.
지금와서 자세히 생각해보니 에이미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게 꽤나 여러번이었던것 같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은 무심한 반응이나 하고.
그때마다 상처받았을 에이미 생각에 크로노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 이번엔 자신이 답해줘야 겠다는 생각에 나노하의 말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틀에 묻은건 깨끗이 닦고 다시 예쁘게 담는거야."
"알겠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자그마한 틀에 방금전에 녹인 초콜렛을 부었다.
자칭, 타칭 타카마치가 특제 비법이 들어간 초콜렛은 달콤한 향기를 부엌 가득히 흩뿌리며 틀에 안착했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냉장고에 넣고 다른걸 만들자!"
"또 만드는 거야?"
"당연하지!"
생각없는 크로노의 질문에 나노하는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크로노는 왜인지 혼만 나는것 같았지만 명석한 두뇌를 갖고있는 크로노는 역시 불평같은건 하지 않았다.
"잠깐. 나 페이트랑 전화가 안끝나서 다시 전화받고 올게."
"아, 응."
틀에 얌전히 담겨있는 초콜렛들을 냉장고에 조심스레 밀어넣고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수화기는 아까전에 자신이 놓은 모습 그대로 탁자 위에 놓여져 있었다.
"여보세..."
하지만 수화기에서 들려오는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기계음이었다.
"어라? 페이트가 끊었나?"
크로노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상관없겠지. 집에서도 볼 수 있고."
온통 초콜렛에 집중되있는 크로노는 별 생각 없이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후로도 부엌은 난장판의 연속이었다.
이런일은 처음하는 크로노로선 도무지 손에 익질 않아 실수 연발이었기 때문이었다.
초콜렛을 불에 직접 녹여 태워먹기도 하고 틀에 채워 넣으라니까 아예 들이 붇고 초콜렛을 감쌀 초콜렛 가루를 터뜨리기도 했다.
타카마치 부엌이 생긴 이래로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크로노의 초콜렛은 작은 사각형의 초콜렛 몇개와 두손바닥 사이즈의 하트모양의 초콜렛이 한개.
그 위에 I love you라고 써져 있었다.
"저기, 나노하. 이거 좀 그렇지 않아?"
"그런가? 하지만 난 좋다고 생각되는데. 크로노하고 에이미씨한텐 그정도가 좋아. 응."
나노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직접적인게 좋은거야. 크로노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잘 안될거 같은걸."
"으윽....."
나노하의 지적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하고 크로노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일은 어쨌든 나노하가 선배니까 얌전히 따르자. 비록 부끄러워 죽을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안먹었네. 먹고갈래?"
"아니, 됬어. 초콜렛냄새 때문에 속도 별로 안좋고."
장시간 동안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초콜렛을 바라보며 먹기도 하고 냄새도 계속 맡고 있어서 속이 별로 않좋았다.
나노하는 간단히 크로노의 상태를 받아들이고는 문밖까지 배웅을 나갔다.
"내일 잘해야되! 파이팅!"
"알았어. 오늘 고마웠어."
두손을 불끈 쥐고있는 나노하를 뒤로하고 크로노는 자신이 만든 초콜렛이 들어가 있는 상자를 품에 꼭 껴안으며 걸어갔다.
내일 일어날 일에 긴장을 잔뜩해 어정쩡한 몸을 이끌면서.
어쩐지 피곤해진 몸을 간신히 이끌고 집앞에 도착했다.
겨우 초콜렛을 만들었을 뿐인데...
심호흡을 한번 깊숙히.
크로노는 꼭 끌어앉고 왔던 초콜렛 상자를 다시 외투 안쪽으로 집어넣어 티나지 않게 옷매무새를 고쳤다.
잠금장치를 간단히 해제하고선 집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던 에이미가 큰소리로 맞이해 주었다.
"크로노야?"
"으, 응. 나왔어."
크로노의 대답에 편하게 널부러져 있던 에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신발을 벗고 발을 내딛던 크로노는 갑작스런 에이미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그만 초콜렛 상자를 떨어뜨릴 뻔 했다.
허둥대는게 눈에 뻔히 보이는 행동이 에이미의 눈썰미를 가늘게 만들어 버렸다.
"왜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니, 별로..."
조마조마 했다.
초콜렛을 지금 들키면 안된다. 내일 정식으로 에이미한테 건내줘야 하니까.
크로노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빨리 진정되길 바라면서 에이미의 눈치를 살폈다.
에이미는 의심쩍은 눈초리를 했지만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지 다행이도 금세 거실로 되돌아 갔다.
"하아...."
크로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나왔다.
흘끗, 에이미가 앉아 있는 쇼파를 한번, 다시 초콜렛 상자를 끌어안으며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페이트는?"
"저녁먹고선 방에 들어가던데? 그 이후로는 못봤어.. 잠이라도 자고 있나?"
"알았어."
크로노는 부엌 옆에 자리하고 있는 계단을 올라 먼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초콜렛 상자를 재빠르게 이불 속으로 숨겼다.
이불을 매만지며 티나지 않게 고친후 몸을 돌려 페이트방으로 향했다.
나노하 집에 있을때 전화를 마저 못했으니 만나야 할것 같은데, 에이미의 말에 따르면 자고 있을 확률도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크로노는 약하게 페이트의 방문을 노크하고 대답이 없으면 페이트를 만나는걸 포기하기로 했다.
먼저 자버렸다는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것이다.
살금 페이트방 앞으로 다가간 크로노는 똑똑, 방문을 두번 두드렸다.
역시나라고 할까, 페이트의 방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고있나 보네."
그렇게 결정을 내린 크로노는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 갔다.
이불을 걷어 상자를 바라본다.
리본으로 만든 하트가 붙어있는 상자를 보자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다시 이불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크로노의 머릿속에선 초콜렛이 녹아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피어올라 하는 수 없이 이불을 들쳐올려 초콜렛 상자를 꺼냈다.
책들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으로 다가간 크로노는 책들을 빼버리더니 초콜렛 상자를 그속에 감추고는 바깥을 책으로 덮어버렸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크로노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흘끔 흘끔 상자가 감춰져 있는 책장을 살펴봤다.
어쩐지 진정이 되지 않는다. 잠도 오지 않을거 같고.
오늘밤은 길게 느껴질것 같다.
잠든 의식이 서서히 깨어가기 시작했다.
창 밖은 해가 어느정도 나와있어 아침도, 점심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왠일인지 크로노는 그런 어정쩡한 시간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하지만 늦게 일어났음에도 눈엔 피로가 가득해 보여 피곤해 보였다.
"잠을 별로 못잤네....."
작게 중얼거린 크로노는 고개를 두어번 흔들고선 어제 자신이 숨겨놓았던 초콜렛 상자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이것을 에이미한테 건내줘야 한다.
사실 잠을 설친것도 이것을 어떻게 건네줘야 할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었다. 결국 좋은 해결책 같은건 떠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에이, 모르겠다."
모든것을 체념한듯 크로노는 아래층에 내려가 씻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들이부으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하는 기대감에서 였다. 허나 찬물을 부어도 매한가지. 달라지는건 없이 정신만 또렷해져 긴장감만 상승해갔다.
"이제 일어난거야?"
터덜거리며 화장실을 나오자 에이미가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는 인물과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면에 크르노는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필이면 지금 만나다니. 좀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한웅큼 불만이 속으로 터져나왔다.
"크로노?"
"아, 아.. 응. 어쩌다 보니 지금 일어났네.."
어딜봐도 어색함이 뚝뚝 떨어지게 크로노는 대답하고 있었다. 에이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상체를 숙였다.
때문에 크로노의 얼굴 가까이에 에이미의 얼굴이 쑥, 하고 내려오게 되었다.
"뭐, 뭐하는 거야?!"
"응? 아니 뭐... 상태가 안좋아 보여서 말야. 살펴볼까 해서."
"난 괜찮아!"
"괜찮아 보이진 않는데....."
지레짐작으로 놀란 크로노는 안절부절 못한상태로 울쌍이 되어 에이미를 바라봤다.
에이미는 에이미대로 어딘가 이상한 크로노때문에 걱정이 됐는지 눈썹을 모으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되겠다. 이상태로 가다간 뭔가 더 상황이 않좋아 질 것 같아.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무의식중에 저런 결론에 달한 크로노지만 딱히 이곳을 요령좋게 빠져나갈 인물은 못되는 크로노기에 어찌하지도 못하고 머릿속만 하얗게 변해간 끝에-
"에, 에이미! 여기서 꼼짝 말고 서있어!"
지금의 상황을 모면한다고 말한 대사가 고함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외침과 동시에 에이미의 상태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쿵쾅거리며 두세단씩 올라가는 크로노의 모습은 남자아이에게서 나오는 박력이 서려있었다. 에이미는 벙찐 표정으로 눈앞에서 사라진 크로노의 말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왜인지 어정쩡한 모습으로.
위층에 뛰어간 크로노는 단숨에 자신의 방으로 뛰쳐가 고이 보관했었던 초콜릿 상자를 누군가에게서 뺏다시피 낚아 챘다. 저렇게 난폭하게 다루다가 안의 초콜릿이 모두 박살나 버리는건 아닐까, 싶을 만큼. 그 초콜릿을 만든 당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올라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올때도 쿵쾅거리며 뛰어 내려온 크로노의 손에는 약간은 구겨져 있는 상자가 들려있었다.
순식간에 다녀온 크로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별거아닌 거리였지만 다른 의미로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손에 든건 뭐야?"
"아, 그...."
에이미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점점 울쌍이 되어가고 눈동자는 방황하며 이리저리 움직여 갔다.
전해줘야 한다. 전해줘야 하는데 긴장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저 건네주기만 하면 될텐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이런 단순한 것조차도 할 수 없다니 여태까지 헛살아온것은 아닐까.
속으로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크로노는 팔을 들었다 놨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얼굴을 울그락 불그락하면서 가만히 있질 못했다.
크로노의 이상한 행동에 에이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
에이미의 손이 크로노의 볼에 닿기 직전에 크로노의 얼굴이 들어올려지면서 크게 입을 열었다.
"이거! 받아줘!!!"
크로노는 외침과 함께 상체를 90도 가까이 숙이면서 상자를 두손에 들고 에이미를 향해 쭉 뻗었다.
아랫사람이 볼수조차 없는 사람을 향해 무언가를 바치는 것 같은 모습.
돌연 그런 이상한 상황에 에이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움찔거리며 손을 움직여 두손에 움켜져 있는 상자를 조심스레 받았다.
크로노는 자신의 손에서 상자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숙였던 상체를 되돌렸다. 그러고는 부릅뜬 눈으로 에이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렬한 눈길을 받은 에이미는 뒤로 한발자국 본능적으로 물러나 버렸다.
"지금 열어봐도 되?"
"......응."
여전히 얼굴표정을 풀지 않는 크로노를 경계하듯이 살펴보면서 에이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구겨져 있는 상자는 무시하면서 포장지를 뜯어내자 투명한 유리상자가 있고 그속엔 별모양이 새겨져 있는 비닐봉투안에 고이 감싸여 있는 초콜릿 몇개와 또다른 상자가 들어있었다.
"크르노 이거..."
"그, 다, 다른 상자도 푸, 풀어봐."
크로노의 말에 에이미는 속에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고선 유리상자를 바닦에 내려놓았다. 갈색의 종이상자를 열고 있는 에이미의 양볼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한번 작게 숨을 쉬고 닫혀있는 상자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까만 상자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들어내는 내용물은 귀엽게도 하트모양을 하고 있어서 에이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상자속의 내용물은 까만 하트모양 위로 하얀색의 글씨가 삐뚤빼뚤하지만 한자한자 조심스레 적혀있었다.
"I love you..."
에이미는 눈으로 글씨를 따라가면서 거의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조그마하게 읊조렸다.
크로노는 작지만 확실히 자신의 마음을 읽어준 에이미의 목소리에 경직된 자세로 얼굴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크로노군...."
천천히 올려진 에이미의 눈가엔 방울만한 눈물이 또르륵 흘러 내려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울고 있으면서 웃고있는 얼굴은 볼썽사나웠지만 지금 크로노의 눈엔 누구보다 예쁘게 보였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니까.
"크로노군...!"
다시 크로노의 이름을 되뇌이며 에이미는 크로노를 향해 안겨왔다.
두손을 크게 뻗어 크로노의 목에 둘러 얼굴을 맞대 껴안았다. 덕분에 에이미의 눈물이 크로노의 뺨이며 어깨에 닿아 젖어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느때보다 가까이 있는 지금 크로노는 에이미의 작게 떨리는 몸이 충분히 느껴져 왔다. 기쁨때문에 떨리는 몸을.
크로노는 조금더 느끼고 싶어 에이미를 꽉 껴안았다. 자신의 고동도 충분히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면서.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행복하다.
작은 선물 하나로, 작은 용기 하나로 이런 기분을 맞볼 수 있다면 나중에 또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
그때에는 좀더 멋있게 줄 수 있을까? 지금보다 당당히, 에이미가 더 기뻐할 수 있게.
그때가 올때까지 지금의 마음을 소중히 하자. 나의 품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 another couple story~~~~~~~~~~~~~~~~~~~~~~~
"페이트짱~ 여기, 여기~!"
낮은 언덕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얌전히 앉아있던 나노하는 기운차게 일어나 멀리서 뛰어오는 페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별로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집에서 부터 뛰어왔는지 페이트의 이마엔 쌀쌀한 날씨임에도 땀이 베어 있었다.
나노하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자 페이트는 바쁘게 움직이던 다리를 좀더 빨리 움직여 나노하를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뛰어오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그냥 페이트짱네 집에 갈걸 그랬나봐."
"아냐, 별로 안뛰었어. 괜찮아."
나노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페이트를 향해 말하자 페이트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면서 달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부드럽게 웃는 얼굴. 하지만 그런 페이트의 얼굴엔 어째서인지 쓸쓸함이 묻어나오는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초콜렛을 줄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차있던 나노하는 평소라면 깨달았을 페이트의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해맑게 웃고만 있었다.
"페이트짱, 여기 이거. 선물이야."
"선물?"
뒤로하고 있던 한손을 앞으로 활기차게 내뻗는 나노하의 손엔 분홍색의 리본이 묶여있는 하얀 상자가 쥐어져 있었다.
페이트는 뜻밖의 선물에 놀라면서도 선물의 기분좋음에 얼굴을 상기시키며 건네받았다.
조심스레 리본을 풀었다. 포장지도 최대한 구겨지지 않도록.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몇번의 손길을 거치자 포장지속에 숨어있던 상자는 모습을 들어냈고 고이 닫혀있던 뚜껑을 열었다.
다양한 모양의 초콜렛들. 아기자기한 초콜렛들이 각각 비닐에 쌓여 상자 가득 담겨 있었다.
"초콜렛?"
"응. 발렌타인데이때 초콜렛 못줬잖아. 그래서 대신이라고 할까.... 다른날에 줬지만 아무래도 그날 못준게 마음에 걸렸었거든."
얼굴을 숙이면서 말하는 나노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귀가 빨개 있어서 쑥스러워 하고 있다는게 충분히 전해져 왔다.
이렇게 선물을 주고 받는건 지금까지 많이 해온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노하는 줄때마다 얼굴이 금세 달아오른다.
페이트는 나노하의 변함없는 행동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하나하나 포장되어있는 초콜렛중에 제일 위에 나와있는걸 하나 집어들어 쏙하고 입에 넣었다.
페이트의 입맛을 생각한건지 너무 달지 않은 초콜렛은 약간 씁쓸하면서도 그윽하게 입안에 맴돌았다.
"어때? 괜찮아?"
"응, 맛있어. 어떤 초콜렛보다도."
페이트가 활짝 웃으면서 얼굴을 가까이 하자 나노하는 기쁜지 얼굴이 풀어져 갔다. 흘러나온 작은 웃음소리엔 즐거움이 묻어있었다.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나노하가 만든 초콜렛을 나눠먹고 있자 나노하는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두손뼉을 치면서 페이트를 향해 고개를 홱하니 돌렸다.
"맞다! 오늘 크로노군, 에이미씨한테 초콜렛 줬어?"
"오빠?"
돌연 다른인물의 등장에 페이트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되묻고 있었다.
크로노라는 인물. 오늘 나노하한테 전화오기 전까지 머릿속 한구석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인물의 등장. 페이트는 또다시 기분이 우울해 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노하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하기 위해 입을 움직였다.
"글쎄, 내가 나올땐 오빠는 아직 자고 있었거든. 그래서 잘 모르겠어."
"우웅.... 그래? 꼭 전해줘야 할텐데."
"무슨 일인데?"
볼을 부풀리며 고민하고 있는 나노하에게 참지못하고 궁금한것을 물어보았다. 더이상 혼자 끙끙대봐야 알 수 없는건 알 수 없는거고. 하루동안 지쳐버렸다고 해야 할까, 눈앞의 나노하를 보니 어쩐지 고민하고 있는게 한심하다고 느껴져 버렸다.
"사실 어제 초콜렛 재료를 사면서 크로노군을 만났거든. 그래서 크로노군이랑 같이 초콜렛을 만들었어. 나는 페이트짱한테 줄 초콜렛, 크로노군은 에이미씨한테 줄 초콜렛."
"에이미한테?"
"응."
페이트는 나노하의 말을 듣자 뭔가 머릿속에서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복잡하진 않지만 단단하게 꼬여있던 실타래가 간단한 말 한마디로 풀려나간다.
"그게 크로노군. 누가 봐도 에이미씨를 좋아하고 있잖아? 그런데 정작 크로노군은 잘 모르는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힘좀 썼어!"
나노하는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양손을 옆구리에 올려놓으면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있었다. 어쩐지 콧김도 살짝 세진것 같은 기분.
페이트는 두눈을 껌뻑거리면서 나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당하게 페이트를 바라보고 있는 나노하의 얼굴은 착한일 했으니까 칭찬해달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 같기도 했다.
바보 같았다. 겨우 이런일로 나노하를 오해해 버리다니. 혼자서 이상한 상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나노하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나노하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져 갔다.
그렇게 생각하자 두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에? 페이트짱 울어? 왜그러는 거야?"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주위가 어떻던 간에 그저 마음가는 대로 눈앞의 사람을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건데. 그러면 틀림없이 대답을 해주는데.
두팔을 뻗어 나노하를 끌어앉았다.
나노하는 페이트의 행동에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얌전히 페이트의 품속에 들어갔다.
"정말로 괜찮아?"
"응, 괜찮아. 기뻐서 그러는 거야. 나노하가 정말로 좋아서."
"아.... 응.... 나도 페이트짱이 정말 좋아."
서로 껴앉은 둘의 얼굴은 똑같이 터질듯 빨갛게 변해 있었다.
터질듯한 얼굴은 웃음이 한가득.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after story~~~~~~~~~~~~~~~
"크로노군~!"
"아, 나노하."
"좋은아침. 어제 에이미씨한테 초콜렛 줬어?"
"응. 뭐.. 어떻게든 전해줬어."
"그래? 에이미씨 어땠어?"
"어떻긴... 뭐.. 좋아해 준거 같아."
"다행이다. 거봐, 내말 듣길 잘했지?"
".......... 그런거 같아. 저기, 고.. 고마워...."
"냐핫, 고맙긴 뭘. 이제부터는 에이미씨한테 좀더 잘해줘."
"노력하도록 할게. 저기 나노하."
"응?"
"이거 받아."
"뭔데?"
"연극 티켓. 2장이 들어왔는데 에이미가 본거라서."
"에? 하지만... 크로노군이라도 보면 되잖아?"
"난 그런 로맨스쪽은 별로 안좋아하니까. 게다가 이번에 나노하가 도와줬기도 하고. 그에 대한 보답이야."
"...... 응, 고마워. 페이트짱이랑 보러갈게."
"그래. 저, 저기..."
"왜?"
"내년 화이트... 데이때도.... 좀 도와... 줬으면... 좋겠..어....."
"응! 맡겨만줘!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테니까!!!"
"그, 그럼 난 이만!"
"안녕~ 크로노군! 에이미씨랑 힘내!"
"히, 힘내긴 뭘?! 그러는 너야말로 페이트랑 계속 친하게 지내줘."
"응, 고마워. 그럼 다음에 봐."
"아아, 그래. 다음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