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하]-<present>- 09

-<present>-

 

 

생소한 공간에서의 익숙한 사람의 모습은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것이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신선하다 못해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머리가 혼란스럽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걸까?

하워드씨의 집에 찾아온 사람은 어째선지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린이었다.
언제나 활발하게 웃고있던 얼굴엔 그늘이 져있어서 오랜만에 봤음에도 불구하고 반가움보단 인상이 절로 써지게 만들었다. 그런 린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얼굴과 어울리게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페이트씨.... 여긴 어떻게."
"난 일때문에 여기 온건데.... 린은 하워드씨하고 아는 사이였던 거야?"
"아.... 저....."

가벼운 마음에 물어봤던 질문이었지만 린은 어째선지 선뜻 대답하질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감춰놓은 사람마냥 나와 하워드부인을 흘끔흘끔 곁눈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린이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사이에 들어온건 하워드 부인이었다.

"아, 페이트씨 죄송해요. 하던 대화는 내일 마저 해도 괜찮을까요?"
"네? 아, 저기..."

하워드부인의 발언에 린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부인을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웃고있는 부인의 얼굴을 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서 대답을 했지만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고 더듬거리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대화의 당사자가 나중에 하자고 하니 얘길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쩔수 없이 그에 따라야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중단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난처했다.

"정말 죄송해요. 부탁드릴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고개를 몇번이나 숙이는 부인에 하는 수 없이 마음을 접기로 했다. 이렇게 밤늦게 불쑥 찾아온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준 부인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이정도의 부탁쯤이야 내가 결례를 범한거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페이트씨가 묵으실 방은 2층에 올라가셔서 오른편에 바로 보이는 방을 쓰시면 되요. 편하게 쓰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서로에게 작게 목례를 한뒤 린을 향해서도 손을 흔들자 린도 어색하지만 확실하게 손을 흔들며 맞받아 주었다.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리를 이동하자 린과 부인도 같이 다른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마 아까전까지 나와 대화를 하던 곳에 갈 생각인것 갔았다.

은은한 조명이 계단을 비추는 광경을 보면서 과연 이 계단이 나를 어디로 이끌어 주게 될지 생각에 잠겼다. 불과 몇개 되지 않는 계단이었지만 오르는 내내 생각이 다른쪽에 쏠려있었던 탓인지 생각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는 계단을 오르면서 한편으로 나노하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얕게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정신은 이윽고 어둠을 깨고 수면위로 떠올라 버렸다.
낮선 환경 탓인지, 머릿속을 뒤덮고 있는 갖가지 생각 때문인지 밤새 뒤척이다 겨우 들어버린 잠도 얼마 안가 달아나 버렸다.
머리가 무거웠다. 뿌연 안개속에 갖혀버린것 처럼 기분이 나빴다. 동시에 갈증이 끓어올라 덮고있던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붙여 걸어나갔다. 어둑한 실내속에서 벽에 손을 붙인체 걸어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부엌이 있었던 것을 봤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허락도 없이 손을 대면 실례일 수도 있겠으나 갈증을 해결하려면 어쩔수가 없었다. 계단을 다 내려와 두리번 거리며 부엌을 찾자 예상치도 못했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저리 가란말이야! 누나까지 데리고 가지마!"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소리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너무도 안어울리는 소리였다.
고막을 찢을것 같은 높은 소리엔 자신의 감정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무작정 떼를 쓰는 어린아이의 음색이 고스란히 베겨 있었다. 마음속엔 여러 감정을 품고 있지만 아직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외쳐댈 뿐인 어린아이의 미숙함이.

"누나는 몸이 안좋단 말야. 내가 지켜줄꺼란 말야!"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소리가 나는곳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장소라 처음엔 멈칫했지만 별다른 무리없이 여전히 소음이 퍼져나가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된것이 하나. 지금까지 들려온 목소리는 이곳의 귀여운 아들인 티엔의 목소리라는 것이었다. 티엔의 외모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리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어째서 누나마저 데려가려고 하는거야?"

도착한 곳엔 어둠에 가려 까맣게 물들여 버린 갈색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한뼘도 안되는 틈새에서 격정적인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소중한 사람을 이미 데려갔잖아?"

문의 한구석에 달려있는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자상하고 상냥했던"

잡고있는 손에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아빠를 데려갔으면, 아빠를 죽였으면 됐잖아? 그런데 어째서 형까지 데려가려는 거야?!!!"

순간 정신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얼이 나가버렸다.

지금 티엔이 무슨말을 하는것일까?
자기 스스로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서 하는 말일까?
알고서 하는 말이라면 티엔의 앞에 서있는 자가 하워드씨를 죽인 범인이라는 걸까?
그런데 어째서.......... 그 자리에 린이 서있는거야....?

혼란스러웠다. 넋이 나갈것 같았다.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이 모든 상황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거부하고 있었다. 거부하고 싶었다. 린을 믿고 싶었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린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쫒아오던 사건의 범인이 눈앞에 있다.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지금 무슨....."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작은 한숨처럼 소리가 새어나갔다.
티엔이 버럭 소리지른 후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읊조린 소리는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덕분에 린과 같이 대화하듯 서있던 하워드 부인과 조금 멀리서 소리지르고 있던 티엔이 고개를 돌려 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다.

난데없는 나의 등장에 세사람 모두 놀랐는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금전의 고함들이 거짓이라도 된듯 적막하기만 했다. 누구하나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듯한 침묵이 방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런 답답한 공간을 깨뜨리는 움직임이 순식간에 방안을 가로질러 티엔에게로 다가갔다.

"린...!"

삼각형으로 서로를 마주보던 형태가 린의 이동으로 깨져버렸다.
린은 티엔을 등뒤에 서서 오른손으로 목을 팔로 감아 조르고 있었다.

명백히 자신이 범인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린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앞서 소리치던 티엔의 말들이 사실이란걸 스스로 인정하는 모습에 화가났다.
어째서 변명하지 않고 저런짓을 하는가. 어째서 나의 기대를 한번에 부셔버리는가.

린은 티엔을 인질로 삼고서 나와 하워드 부인을 번갈아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베리어자켓을 입고 린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티엔이 붙잡혀 있는 상태로는 쉽사리 어떤 움직임도 보일수 없었다.
잔뜩 조심하는 눈빛이 나를 지나쳐 하워드부인과 엇갈리는 순간 하워드 부인이 모든걸 체념한듯 두눈을 꼭 감았다.

"맨 끝방...."

하워드 부인의 입에서 작디작은 소리가 들리자 마자 물건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폭발하듯 들렸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쏟아지던 달빛이 장해물이 사라지자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창문의 끝자락엔 린의 뒷모습이 걸쳐보였다.

똑같이 린을 따라 창문을 향해 뛰어들었다. 발이 창틀에서 떨어지고 완벽히 온몸이 공중에 뜨게 됐을때 바르디슈를 기동시켜 단숨에 건물의 제일 끝을 향해 날아올랐다.

불과 1,2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깨진 창문 사이로 까만 커튼이 춤을 추고 있는 방을 발견하고 몸을 던졌다.
들어가자 불빛조차 한점없는 방안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있는 티엔이 보였다.

다가가 살펴보자 다행히 다친곳은 없어보였다.
단지 놀란마음에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며 울고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혹시 있을 린의 공격에 대비해 티엔에게 베리어를 쳐주기 위해 바르디슈를 휘두르려 하자 또다시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상황을 깨닫고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하자 빛나고 있는 유리 넘어로 저 멀리 린이 날아가고 있는게 보였다.
하지만 린 혼자라고 하기엔 몸집이 너무 커보였다.
날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보자 다리가 4개인 점을 보아 한명이 더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의 크기는 이상하리 만치 컸었다.

마저 린을 쫒기위해 소리의 방해로 끝마치지 못한 베리어를 해주기 위해 몸을 돌리자 티엔이 쓰러져 있었다.
작은 몸이 바닥에 힘없이 널부러져 있어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걸 보여주고 있었다.

머리속에서 갈등이 일었다.
티엔을 우선시해 보호할 것인가, 방치하고 린을 쫒아갈 것인가.
간단한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뒤쫒는다는 안이한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린의 속도는 다른것을 할 틈이 없을만큼 너무나 빨랐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져 얼굴에 인상이 써졌다. 그와 동시에 티엔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갸냘픈 숨을 몰아쉬는 티엔을 끌어앉고선 분한 마음에 다시금 린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밤의 장벽에 숨어 커다란 물체처럼 보이던 린이 달의 차가운 품속으로 들어가자 윤곽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두눈에 똑똑히 새겨졌다.
자신의 몸보다 2배나 더 큰 커다란 날개가 린의 등에서 펄럭이고 있는 모습을.

 

 


머리가 욱씬욱씬 거린다.
익숙한 기동6과의 복도를 걷고 있음에도 다른곳에 온듯 현실감없이 피곤해져 갔다.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도 안되는 시간동안 일어난 여러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혼란스런 생각을 붙잡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한 시간.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어도 쉬지 못하고 이렇게 6과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이른아침이라 텅텅 비어버린 차가운 복도는 자신의 발소리만을 울리고 있었다.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린이 도망가고 난 후 하워드 부인에게 여러가지 물어봤지만 부인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입술을 굳게 닫고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참는듯 때론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답답했다. 티엔은 무사했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마음속에 남는건 혼란과 분노와 탄식과 의문뿐이었다.

이대론 부인과 입씨름을 해도 결판이 나지 않을것 같았다. 이곳에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느니 6과로 돌아가 하야테에게 보고를 하고 조사를 진행하는게 나았다.
하워드 부인이야 나중에 언제든지 소환해서 취조할 수 있으니 일단 급한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익숙한 문앞에 서서 숨을 깊숙히 들이 마쉬고는 내쉬었다.
긴장을 풀기 위한 작은 동작은 도움이 됬는지 뻣뻣했던 몸이 조금은 편해지는것 같았다.

6과에 오면서 하야테에게 미리 중요한 사항만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덕분에 지금처럼 이른 시간 이라면 사무실에 없을 하야테는 책상에 앉아 인상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건때문이던, 일찍 일어난것 때문이던.
 
방의 주인의 허락따윈 받지 않고 문을 열어 들어갔다.
나의 무례한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제지따윈 들리지 않았다.
몇걸음 걷자 넓은 방 안에 창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있는 하야테의 모습이 보였다.
두손을 깍지끼고서 턱에 괴고있는 모습은 하야테가 고민할때 종종 보던 모습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네."

하야테 나름의 배려였는지 싱긋 웃으며 안부를 물어왔다.
평소였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운차게 웃으며 대꾸를 했겠지만 지금은 하야테 말대로 너무나 피곤했다. 우울한 표정을 바꾸지 못하고 하야테의 말에 끄덕이기에도 벅찼다.

"응, 조금 피곤하네."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말에 둘은 서로 씁쓸하게 웃었다.
차가운 아침의 공기가 찜찜하게 들러붙는듯 해서 기분이 좋아지질 않았다.

"여기, 하워드씨네서 일어난 일들."

힘없는 말과 함께 옆구리에 계속 껴놓고 있었던 서류철을 하야테에게 내밀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직사각형을 보자 하야테의 눈썹이 더욱 모여져 갔다.

"응. 알겠데. 그럼 이제 방에 돌아갈기가?"
"일단은 그래야 겠지."
"아, 아마도 너네들 방에 진이라는 아가 있을기니까 알고있어."
"진....?"

하야테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지금도 계속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인물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순간, 아니라면 너무나 미안하지만 불온한 생각이 스물거리며 피어올랐다.

"어제 이차저차 해서 진이 이곳에 왔거든. 돌아갈땐 너무 늦었으니까 아마 나노하짱이 데려갔을거라 생각하는데. 응, 잠깐, 페이트짱?"

보통의 속도로 얘기하고 있을 하야테지만 나의 눈에는 비디오 테이프를 천천히 돌리는 것처럼 느리게 들려오는 하야테의 말소리가 완전히 귀에 꽂히자 몸이 먼저 반응해 다리가 뛰고 있었다.
등 뒤로 당황한 하야테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도 무시하고서 달렸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아니 지금 낼 수 있는한 최대의 속도로 달려가자 나와 나노하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은 금세 나타났다.

문이 열리자 마자 최대한 숨죽이며 조심스레, 하지만 재빨리 방으로 몸을 옮겼다.
이른 아침, 모두가 자고 있을때 느껴지는 싸늘하고도 조용한 침묵이 방안 한가득 퍼져있었다.

방안을 둘러보자 특별히 이상한 점은 보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눈으로 나노하를 보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어 나노하가 자고 있을 침대로 다가갔다.
넓직한 침대위엔 가지런히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약한 숨소리를 흘리는 나노하가 곤히 자고 있었다.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자고 있는 나노하를 깨우는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달콤한 잠을 방해받아 기분이 상했는지 기분좋던 얼굴은 구겨졌다.

"나노하, 괜찮아?"
"으응... 페이트... 짱...?"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며 확인한 인물이 나라는 것을 깨닫자 구겨진 얼굴은 자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 좋은 얼굴로 변해갔다.
속마음이 빤히 보이는 나노하때문에 나도 똑같이 얼굴이 풀어졌다.

"어디 이상한덴 없어?"
"응? 아니, 난 괜찮은데."
"정말?"
"응. 왜그러는데? 페이트짱 이상해."

지금의 상황들이 이해가 가질 않는지 의문을 담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확실히 자고 있는데 깨워져서는 이상한덴 없냐느니, 괜찮냐느니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만 했다.
아직 나노하는 린에 대해서 듣질 못했을테니까 대충 얼버무릴 변명거릴 생각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봐."
"괜찮은거야? 마실거라도 타다줄까?"
"아니, 괜찮아. 심한건 아니니까."

의문은 말 한마디에 걱정으로 변해 나노하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따뜻한 손길이 닿아있는 이마가 기분좋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제 진이 여기에 왔었다며?"
"아, 맞다. 응, 진하고 하루밤 같이 있었어. 쇼파에 있을텐데...."
"쇼파?"

방에 들어와 살펴볼때 쇼파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혹시 못보고 지나쳤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재울려고 했는데 진이 사양해서. 편하게 있어도 됬는데."

나노하는 어젯밤 일이 불만이었는지 입을 내밀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실에 있는 쇼파에 다가갔지만 진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반듯하게 게어진 이불이 쇼파 끄트머리에 얌전히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한발 늦게 다가온 나노하 또한 진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어..... 어디갔지..?"

진이 사라진게 뜻밖이었는지 당황하고 있었다.
나노하와 같이 거실을 둘러보다가 테이블 한켠에 놓여져 있는 종이 한장을 발견했다.
침대 근처의 서랍에 놓여져 있는 메모지인 듯한 종이는 뒷면에 깔끔한 글씨체로 몇줄의 글씨가 써져 있었다.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썼다는 것이 느껴지는 글씨였다.

"편지?"

방안을 둘러보던 나노하도 의문의 편지를 바라봤다.
몇글자 읽지 않아 글을 쓴 주인이 진이라는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먼저 글로써 인사를 대신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부득이하게 일찍 가봐야 될 일이 생겨서 실례인줄은 알지만 이렇게 편지를 쓰고 갑니다.

   어제는 나노하씨가 많이 도와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캐러멜 밀크도 나노하가 타주셔서 그런지 정말 맛있었습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나노하씨한테 계속 받기만 하는것 같아 미안하네요.
 
   다음에 만나면 그땐 제가 뭔가를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티엔-


공손하고 예의바른 내용은 나노하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편지였다.
어린 나이에 비해 어렵고 딱딱하게 쓴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여태까지 봐왔던 티엔을 본다면 고개가 끄덕여 지는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급히 돌아가야 될 일이 생겼다는 말인데, 그 일이란게 린과 관련된 일인걸까.
만약 그렇다면 진이 린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된다. 그렇다면 조금 싫은 전개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고민하고 있어봐야 아무런 해결도 안나기에 진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나노하를 바라봤다.

"진은 먼저 갔나 보네."
"갈때 인사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노하의 잠을 깨우기 미안했던 거야."
"그렇지만... 조금 서운해..."

진의 인사를 못받은게 그리 서운했던 걸까.
나노하는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늘어뜨려서는 풀죽어 있었다.

현재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나노하로서는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그래도 착잡한 느낌이 드는건 어쩔수 없었다.

편지를 몇번씩이고 읽고있는 나노하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져 지켜보고 있자 하야테한테 통신이 걸려왔다.

"페이트짱, 나노하짱이랑 같이?"
"응, 그런데?"

통신을 열자마자 용건을 말한 하야테는 긍정의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노하짱하고 같이 이쪽으로 좀 와줘."

무언가 중요히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나노하도 하야테의 목소리를 듣고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선 작게 끄덕였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몇마디 안되는 대화를 주고받은뒤 통신은 쉽게 끊겼다.
편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는 나노하를 향해 손을 뻗자 나노하는 웃으면서 손을 쥐어 잡았다.

공주를 에스코트하는 왕자같은 모양새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없애버렸다.

하야테의 부름이다. 게다가 그런 보고서를 받은뒤의 호출.
분명 좋은건 하나 없을거다. 그러니 왕자와 공주라니,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현실도피를 하는것 같은 자신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노하와 이어진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음을 다잡아야 된다. 앞으로 할 일은 잔뜩 있다.

나노하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하야테에게 가기위해 발을 놀렸다.

by | 2011/03/24 02:43 | 소설이라 하긴 부끄럽지만 | 트랙백 | 덧글(0)

[나노하]-<present>- 08

-<present>-

 

 


갑작스런 하야테짱의 통신에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편히 쉬고 있다가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하야테짱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갈아입느라 단정치 못한 제복을 걸음을 옮기는 중에 정리하며 6과 내의 취조실을 향해 갔다.
몇명의 국원을 지나쳐 도착한 취조실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천천히 한번 숨을 고른다음에 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컴컴했을 장소엔 사람이 있는 만큼 밝은 빛이 들어와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던 두사람이 내가 나타남과 동시에 돌아보았다.
하야테짱은 어서오라는 표정으로 살짝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고, 하야테짱의 앞에 있던 진은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한체로 미안한듯이 서서히 고개를 숙여버렸다.

"어떻게 된거야? 어째서 진이 여기 있어?"

여기에 오는동안 떠올랐던 단 하나의 질문을 말하자 하야테짱은 휙휙 손짓을 하며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기에
그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앉는 동안에도 초조한 마음은 사그라들질 못해 시선은 계속해서 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너무 쳐다보믄 진이 부끄럽잖아?"

하야테짱이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졌지만 받아줄 마음이 안들었다. 묵묵히 진을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자
하야테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 이라고 했던가. 암튼 저 아가 야생동물 습격사건으로 통제된 곳에 있어서 데려온거데."
"통제구역에?"

예상외의 이야기에 되물었다.
어째서 진이 그런곳에 있었단 말인가?
전혀 관련없는 둘의 조합에 생각은 이리저리 맴돌다 결국 진을 향해 해답을 구하는 눈길을 보냈다.

약간 눈을 찌푸리며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진은 어쩔줄을 모르고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그때서야 진을 너무 초조하게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는 숨을 한번 고른뒤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미안. 그러니까.... 진 왜 그곳에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그게....."

진은 아직 말하기가 꺼려지는지 우물거리며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그냥.... 미안해서...."
"응?"
"죽은 동물들한테 미안해서 인사하고 있었어요."

조그마한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작게 떨렸지만 확실하게 들려왔다.

"이유도 모르고 죽어버린 동물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건 이런거 뿐이니까..."

마지막 말을 밷으며 숙여버린 고개는 미안해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작아 보였다.
연약한 체구라서 그럴까, 마치 작은 동물과 같아 보여 더이상 떨게 만들면 안되겠단 기분이 차올랐다.

"단지 그것때문에 그곳에 있었던 거야? 다른 일은 없고?"
"네."

단호하게 말하는 진의 모습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점엔 하야테짱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별다른 의심을 하는것 같진 않아 보였다.
어서 빨리 진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 묘하게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자 하야테짱이 시그넘씨한테 뭐라 묻고 있었다.

"네, 확실히 진에게서 전투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진이 야생동물들을 습격하지 않았단 것은 진실인듯 합니다."

하야테짱은 시그넘씨의 말에 생각을 하는지 작은 신음과 한쪽손을 턱에 올리고 가만히 있었다.

"뭐, 본인의 증언이랑 여러 상황이 진이가 야생동물 습격의 범인은 아닌것 같긴 한데....."

말끝을 흐리는 하야테짱의 목소리엔 아직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지 탁해있었다.
걸리는게 있는걸까.... 혹시라도 진이에게 안좋은 말이 나올까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인상쓰지 말라구, 나노하짱."
"아.. 미, 미안.."
"하핫, 미안할것 까지야. 그런데 진..."
"네..?"

갑자기 들린 자신의 이름에 나쁜장난이 들킨 아이마냥 한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다 좋은데 말야. 어떻게 그 행성에 갔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아.... 확실히 진이 그곳에 있는건 이상하다.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 일단 크게 문제될건 없어졌지만 어디까지나 그곳은 출입이 제한된 곳. 게다가 무인세계라 그곳에 가려면 절차를 걸쳐 차원이동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차원이동 마법을 쓰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마법을 쓰더라도 관리국이 신경쓰고 있는 행성이니까 몰래 들어오는건 쉽지 않겠지만.

하야테짱이 이런걸 물어보는걸 보면 아마 절차를 걸쳐 거기에 가지는 않은것 같다. 그렇다면 진이 마법을 배운걸까?

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책상의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 눈동자가 흐려진걸 보아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이 나한테 숨기려는게 보이는것 같아 불안해 졌다.
진과 나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숨기는게 있다해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쩐지 그런걸 느끼고 있는게 싫었다. 마치 나만 진을 허물없이 대하고 있는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진은 처음만났을 때부터 편안했고 익숙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이렇게 되고나서 처음으로 사귄 관계였으니까.
나도 모르게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분명하게 처음부터 시작한 관계였으니까.
차근차근, 하나씩 쌓아올리는 사귐이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처음의 사람이었으니까.

진은 그런의미에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물론 린 또한 마찬가지로.

잠깐을 고민하던 진은 흐려졌던 눈을 선명하게 바꾸며 고개를 들었다. 두눈엔 여전히 망설임이 있었지만 결심이 선듯 조심스레 입술을 벌리며 소리를 내었다.

"누나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이용한거예요."
"물건?"

하야테짱이 되묻자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했다.
물건이라며 작게 중얼거리는 하야테짱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고개를 갸웃.

"물건이라면 디바이스가?"

하야테짱의 질문에 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난처한지 찡그렸다.

"디바이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몇마디 얘기하다 보니까 그곳에 가있었어요. 그리고 죽어있는 야생동물을 발견한 거고요."

대화를 할 수 있는 물건이란게 뭘까.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디바이스일수도 있겠지만 진은 확신이 없는것 같았다.
디바이스 이외의 첨단 기계가 있는 걸까?

진은 우연히 린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가지고 놀다가 통제구역에 가버린듯 했다.

"그럼 그 누나란 사람은 마법을 배운기가?"
"아마...... 아닐 거예요."
"아마..?"
".............."

애매한 말에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요구하는 하야테짱의 말에도 진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굳게 닫힌 입에선 더이상의 정보는 나오지 않을것 같았다.

"흠......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
"네."
"비타짱하고 잠깐 전투를 벌였다고 들었는데 말야, 비타짱이 일방적으로 건거긴 하지만. 그런데도 상처하나 없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거지?"

뜻밖의 얘기에 질문을 던진 하야테짱과 질문 받은 진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진이 비타짱과 전투를 벌였다는걸 처음 알았다. 여기에서 진을 처음 봤을땐 깔끔해서 전혀 전투를 벌인 사람처럼은 안보였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상처 하나 없이 평상시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선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 하고는 다른 내용 같은데요?"
"헤... 꽤나 똑부러지네."

확고한 말투에 하야테짱은 재미있는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진의 모습은 약간 의기소침해 있어 움츠려 있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당당하게 하야테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옳고 그름이 확실하다고 해야 하나 맺고 끊는게 확실하다고 해야하나.

"확실히 상관은 없지만...."

진의 말대로 하야테짱이 한 질문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진이 있는 이유는 야생동물 습격사건의 범인인가와 함께 어째서 그곳에 있느냐, 라는 내용이니까 말이다. 그 질문들도 어느정도 답이 나왔고.
 
진이 비타짱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선 다른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나 또한 궁금한 점이긴 했으나 진이 거부하는한 더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게다가 전투는 비타짱이 일방적으로 걸었으니 전투에 대해선 진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건에 대해선 진이 항의를 해도 할 말이 없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여기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이유와는 동떨어져 있으니 진이 저렇게 나와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핫, 진. 생각보다 남자다운 면이 있네?"

장난기가 다분한 목소리로 하야테짱은 재미있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덕분에 진은 얼굴이 빨개져서 당황해 말을 더듬고 있었다.

"이제 됐다. 늦게까지 붙잡아 놔서 미안하데."
"아, 아뇨. 제가 잘못해서 그런건데요."
"흠.... 그럼 끝~! 자 이제 돌아가도 된다. 아, 나노하짱은 잠깐 나랑 얘기좀 하자."
"응"

작게 손짓하며 부르는 하야테짱한테 다가가자 하야테짱은 손을 내 목뒤로 두르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어깨동무를 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에 따라 나도 자연히 허리가 숙여졌다.

"무슨 일인데?"

하야테짱과 내가 하고 있는 모습때문이었을까. 목소리 또한 소근소근,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이고 있었다.

"진이 너한테 해꼬지 할 것 같진 않지만 말여, 그래도 일단 조심하라고."
"하야테짱.."
"그렇게 책망하듯이 말하지 마. 어쨌든 수상해 보이는건 어쩔수 없잖여?"
"하지만....."
"나노하짱이니까 알아서 할거라고 믿고 있어. 암튼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 응. 알았어."

힘없이 대답했다. 하야테짱은 그런 나의 모습에 쓰게 웃고는 목에서 팔을 풀고 등을 탁탁 쳤다.

"진을 이렇게 풀어주는건 나노하짱 얼굴을 봐서야. 나노하짱이 믿고 있는 아 같으니 나도 믿는거레."
"응, 고마워 하야테짱."
"자! 그럼 모두 나가봐."

할 얘기를 끝마쳤는지 하야테짱이 손뼉을 두어번 치면서 크게 외쳤다.

"저 실례했습니다."
"어야~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고."

성격이 착실해서 인지 진은 허리숙여 인사하고 문을 나섰다. 진의 뒤를 따라 나서면서 방안에 남아있는 하야테짱과 시그넘씨한테 작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문 밖으로 나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취조실을 나와 고민하고 있으니 진이 말을 걸어왔다.

"전 이제 그만 가볼께요. 폐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응? 아냐아냐. 별일 아닌걸. 아, 그리고 잠깐만."
"네?"
"시간도 늦었으니까 오늘은 내방에서 하루 자고 가면 어떨까?"
"에, 아 저기.. 그게, 괜찮아요! 돌아갈 수 있으니까.."

나의 제안에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똑같이 손도 휘젓고 있었다. 좀전에 하야테짱이 남자답다고 할때보다 훨씬 얼굴이 빨개져서 금방이라도 터질것 같아 보였다.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와 한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다가 진의 손을 낚아챘다.

"거절하지 말고. 내 방에 가자."
"정말로 괜찮아요!"
"내가 안괜찮아서 그래. 자 어서 가자고~"
"아, 저 정말로!"
"성의는 무시하는게 아냐. 이쪽으로~"
"저, 저기, 괜찮ㅇ"
"가자~!"

완강하게 거절하는 진의 말을 무시한체 허공에서 춤추던 진의 팔을 사로잡아 무작정 이끌었다.
끌려고 할때 진이 반사적으로 발에 힘을 주는듯 했으나 포기한 걸까, 곧바로 어정거리며 끌려왔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빨개 있어 곤란하다는 듯, 싫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것이 그나마 남은 저항같아 보여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우리 둘을 멀리서 보면 왈가닥인 누나가 착한 동생을 어디론가 끌고가는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여기가 현재 내가 생활하고 있는 곳이야."

몇개인가의 버튼을 누른뒤 열린 문 앞에 약간 사선으로 비껴 섰다.
마치 안내원이 안내하듯 진을 안내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신도 이곳에 익숙해 진지 얼마 안되었다는 걸 깨닫고는 속으로 조금 쓴 웃음을 지었다.

진은 조금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겁먹은 강아지가 경계하며 들어가는 꼴이랄까, 필요이상 경직된 모습에 진의 등을 밀쳐버리며 안으로 밀어넣었다.

"위험한건 없으니까 그렇게 둘러보지 않아도 되."
"그런게 아니라..."

다분히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였는데도 진은 눈치채지 못한건지, 그런 정신마저 없는 것인지 말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어버버 하며 서있었다.
정말이지 착실한 성격인걸까, 순진한 걸까, 조금 바보같은 걸까.

"편하게 앉아있어. tv켜서 봐도 되고."

이런 비슷한 대사를 페이트짱한테서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그대로 내뱉고 있는 상황이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되기 전의 나였더라면 전혀 신경쓰지 않았을 말.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까지의 내가 아니기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듯 어색했다.

진은 착실하게 소파 오른쪽 끝에 앉아 tv를 키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것만을 시청하고 있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눈도 껌벅이지 않은체로, 혹시라도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인상을 쓰면서. 좀더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얘길 했지만 대답만 알았다고 할 뿐 전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진 않았다.

"자, 한번 마셔봐."

앞으로 내민 오른손엔 캐러멜 밀크가 담긴 머그잔이 하나. 반대쪽 손엔 마찬가지로 내가 마실 캐러멜 밀크가 또 하나.
달달한 향기를 풍기는게 맘에 들었는지 머그잔을 받아 들고선 향기를 한번 맏고는 슬쩍 입가로 가져가며 맛을 보고 있었다.

"아, 이거 맛있네요."
"후훗, 그렇지? 내 자신작 중 하나야.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또 만들어 줄테니까."
"네. 잘 마실게요."

기분좋은 웃음을 띄우며 머그잔을 두손으로 꼭 쥐고는 천천히 마셔갔다. 그때 보인 표정은 오늘 봐왔던 표정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기분이 좋아져 두눈을 감고 캐러멜 밀크를 음미했다.

"여기서 페이트씨랑 같이 사시는 건가요?"

맛을 보던 중에 들려온 질문에 눈을 떠 오른편에 있는 진을 바라보자 작은 탁상 위에 나와 페이트짱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는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세월 중간중간을 가위로 오려 붙여놓은듯 선명히 웃고있는 페이트짱을 보고 있자 입가가 풀어져 갔다.

"응. 기동 6과에 배정받고 페이트짱이랑 같이 생활하고 있어. 오늘 본 하야테짱이 맘대로 상의도 없이 이렇게 해버렸다지 뭐야."

페이트짱한테 들은 얘기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이방에 자게 됬을땐 정말이지 당황했었다. 페이트짱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게 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까 말이다. 페이트짱을 좋아하고 있던 나로선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하기도 해서 진정이 되질 않았었다. 다음날 좋게 해결되긴 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 거리는게 느껴졌다.

"좋겠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살면은요."
"응?"

귀를 파고드는 '좋아'라는 단어에 반응해 버렸다. 덕분에 몸을 움찔거려서 들고있던 캐러멜 밀크가 흘러넘칠 뻔했다.
머그잔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급히 주위에 있던 티슈를 뽑아 닦았다. 머그잔에 묻어있던 얼룩은 지워졌으나 머릿속의 당황은 전혀 지워지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한건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당황의 원인이 되는 당사자는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며 자신의 캐러멜 밀크를 마시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질문을 하는 거야?"
"페이트씨를 좋아하는거 아닌가요?"
"에... 아니, 그야 좋아하긴 하지만."

진의 좋아한다는 의미가 어느정도 까지인가에 대해 고민이 빠졌다.
친구로서의 좋아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인가. 어딘가 얼이 빠지게 대답하면서 속으론 여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어쩌면 이런 고민은 정말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여기는 일본이 아니라 미드칠더. 여러가지로 일본과는 문화가 많이 다르다. 이곳에 살면서 느낀점은 일본보단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것. 지금 나와 페이트짱같은 동성애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대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론 인정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게 일본땅이라서 일까. 그동안 알게 모르게 주입된 사고는 상당히 변하기 어려운것이었다. 이론적으론 알고 있어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다고 할까.

나도 모르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걸 숨기고 있었다. 스스로가 자신의 사랑에 떳떳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서서히 밀려오는 자책감과 페이트짱에 대한 미안함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페이트짱과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다. 그런데 숨기고 있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응... 그래, 좋아해. 좋아하는 페이트짱이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

그래. 좋다. 페이트짱이 너무너무 좋아. 그러니까 숨기거나 하면 안되겠지. 솔직한게 최고니까. 있는 그대로의 기분을 보여주는게 좋다.

"부럽네요. 두분 오래동안 행복할거예요."

나의 대답이 맘에 든걸까. 편안히 감은 두 눈은 더이상의 설명을 강요하지 않았다.

진은 무엇을 바라고 이런 질문을 한걸까? 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여려보이는 외모속에 왠지 속을 알기 힘든 일면도 있어 진이 다르게 보였다. 역시 사람이란 겪어봐야 알게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덕분에 깨달은 것도 있고 진과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는게 옳은 표현이었다. 알면 알수록 진이 좋아지고 있었다. 좀더 대화하다 보면 더 좋은 일이 일어날까?

깨닫고 보니 어느사이엔가 캐러멜 밀크도 다 먹어 버려서 빈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방안은 켜놓은 tv소리와 이따금씩 아직도 마시고 있는 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어도 편안한 신기한 기분에 좀더 이대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진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by | 2011/03/22 02:41 | 소설이라 하긴 부끄럽지만 | 트랙백 | 덧글(0)

[나노하]장난

밤의 정적만이 감도는 조용한 공간에서 허덕이는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다른 무엇도 안중에 없는 듯한 소리는 말 그대로 상대방만을 갈구하며 숨죽이듯이, 하지만 확고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흐읏,.. 페이트.. 쨩..."
"나노하...."

서로의 체온에 열중한체 절대 그 행위를 멈추는일 없이 둘만의 사랑을 속삭여 나갔다.
너무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페이트는 나노하의 민감한 곳을 찾아 움직이고 나노하는 페이트의 움직임에 충실히 반응하며 서로의 역할을 이행해 나갔다.

"사랑해, 나노하."
"응... 나도 페이트쨩을 사랑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둘은 길고 긴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 장난 ~

 

 

 

잠에 빠져 있던 정신이 조금씩 빛을 찾아감에 따라 옷을 입지 않고 있던 몸이 자연히 싸늘하게 느껴졌다. 차가워지는 몸에 조금의 온기라도 더하기 위해 바로 옆에서 곤히 자고 있을 나노하의 몸을 끌어 안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손에 들어오는건 식어버린 공기였고, 자신이 바라던 감촉은 아무리 팔을 휘저어 봐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노..하..?"

몇번인가 허무하게 휘젖고서 좀더 정확히 지금의 상황을 알기위해 뿌옇던 사고를 일으키며 고개를 돌려 나노하가 있어야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없... 어.....?"

바라보자 나오는건 의문의말 뿐이었다. 밤새 서로 사랑을 나누고 같이 잠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나노하 또한 옆에서 곤히 자고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이건 대채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오늘 일찍부터 일이 있다곤 말한적 없고, 오히려 off라 좋아하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가는 사고를 이대로 놔두면 대책이 없을것 같아 일단 몸을 일으켜 집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안에 나노하가 있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일단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나노하 여기있어?"

굳게 닫혀있는 문을 열때마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차례차례 열어갔다. 하지만 역시나 보이는건 사람이 없어 차갑게 식어버린 공기가 가득 차 있는 익숙한 광경들 뿐, 목표로 하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멍하니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있는 침대위에 앉아있다가 문득 들어온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얀 피부 여기저기에 유난히 눈에 띄는 붉은 자국들이 선명히 찍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둘러 옷가지를 챙겨 입기 시작했다. 서두르느라 오히려 입는데 시간이 더 걸림에도 불구하고 서두르는 손길은 더욱 빨라져 갔다.

대충 옷을 다 입을 때쯤 삐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비쳐보이며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페이트쨩! 잘 잤나?"
"하야테..."

혹시나 나노하일까 기대를 하며 틀었던 통신에서 하야테가 나오자 내심 실망했다. 그 감정이 얼굴에도 드러났는지 하야테는 심드렁하게 왼쪽팔을 소파뒤에 걸치며 투덜거렸다.

"뭐야, 그표정은. 사람 김빠지게. 모처럼 소중한 사람을 찾고 있는 페이트쨩한테 좋은 정보를 알려주려꼬 일부러 걸었구만..."
"응?"

예상치 못한 소리에 몸이 반응해버려 높은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하야테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뭐~ 그렇게 놀라서 쳐다보지 말그라. 지금 나노하쨩 찾고 있지?"
"하야테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응~? 뭐... 그야...."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하야테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며 다음말이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하야테는 좀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재밌어 죽겠다는 말투로 이어나갔다.

"나노하쨩을 내가 데리고 있으니까."

씨익 웃으며 말하는 하야테의 말이 처음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째서 나노하가 하야테랑 같이 있는 걸까?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만날 약속이라도 한것일까?

"아아~ 그렇게 사람좋은 표정 하지 말그라. 난 나노하쨩을 '납치'한거니까."
"에? 납..치...?

익숙한 얼굴에서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 하야테짱의 입에서 스스로 자신이 납치했다는 말을 꺼낼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까.

"그려그려, 납치. 말 그대로 나노하짱을 강제로 데리고 와서 감금하고 있다고."
"대체 무슨..."

하야테는 친절히 하나하나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자꾸만 무디게 움직여 제공해주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에 알 수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 이정도 설명하면 알아채야지 않나? 음.... 이정도 하려면 알려나?"

오른손을 턱에대고 고심하던 하야테는 턱에서 손을 떼고 손가락을 부딛혀 딱,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러자 화면넘어 하야테옆에 작은 창이 뜨더니 화면은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중해서 소리를 듣고 있자 점점 피가 머리로 쏠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잠깐, 그만해.. 하지마..! 용서ㅎ"

작게 흐느끼며 부탁을 청하는 목소리는 용서의 말을 마저 하지도 못하고 강제로 끊겨 버렸다.
나는 이 소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없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하야테, 이게 무슨..!"
"이제야 내 말을 믿는 기가? 참으로 느리네~"

노려보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하야테는 평소와 다름없는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화면을 지키고 있었다.
믿지 못했던 친구의 말은 분명한 사실이 되어 나의 정신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믿지 못했던 만큼 사실로서 인지하자 격분해버린 분노가 어디로 튈지 모르게 되었다.

"어째서 나노하를..."

차마 뒤의 말은 잇지 못하고 작은 신음으로 바꿔버리자 하야테는 비웃음을 흘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나노하를 좋아했으니까..."

오랜 친구의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감정을 내비치는 말에 분노는 한순간 사라지고 놀람으로 바뀌어 나도모르게 커져버린 눈동자로 괴롭게 웃고있는 하야테를 바라보았다.

"나노 나노하를 사랑했어. 단지 니가 먼저 시작 해서 내가 말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야."
"무슨... 그렇다고 나노하를."

아무리 하야테가 나노하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들 이제와 하물며 저런 방식으로 나노하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건 분명 잘못되어 있다. 그건 너무나도 명백하고 명확했다. 하야테는 절대로 저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탐하는 사람이 아닐텐데. 어째서 그런 방식을 취했는가. 어째서 이렇게 까지 변해버린거야. 이렇게 될 정도로 나노하를 사랑했던 거야?
변해버린 친구의 모습에 할말을 찾지 못하고 분노를 삭이고 있자 갑작스럽게 하야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집에서 움직이지 말고 내 연락을 기다려."
"무슨 말을 하는거지?"

얼토당토 않는 제안에 날카롭게 노려보자 안색하나 안바꾸고 대화를 계속해 나갔다.

"어딘가 나가거나 통신을 하면 여기있는 나노하는 무사하지 몬할수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다시 연락할때까지 가만히 있어."
"큿.."
"그럼."

일방적으로 자신이 할말만을 하고 끊어버린 통신은 검은 창만을 비추고 있었다. 변해버린 하야테의 모습에 나의 머릿속도 검게 변해버렸다.

"나노하...."

어쩔수 없이 하야테의 말을 조용히 따르며 마음속으로 나노하가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환하게 켜진 거실에서 정신이 나간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친듯이 웃어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을 주위사람은 상관없다는 듯이 웃어제낀 목소리의 주인인 하야테쨩은 그 후로도 당분간 자신의 배를 움켜잡고는 소파를 팡팡 두들기고 있었다.

"주인, 이제 그만 웃으시죠."
"그래, 하야테쨩. 그만 웃어, 페이트쨩이 불쌍해 지잖아."

정말로 뭐가 저렇게 웃길까. 하야테쨩의 웃음의 원인인 페이트쨩은 지금 걱정에 잠겨 있는데.

"이거 조금 심한거 아닐까? 이제 적당히 그만하는게..."
"무신말을 하는 기고?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제지하는 말에 하야테쨩은 펄쩍 뛰면서 역설을 하듯이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을 바로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덕분에 깜짝놀라 소파에 엎어지다 시피 쓰러져 버렸다.

"재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자자, 모두들 협력하기로 한 이상 끝까지 재대로 하야지!"

제발 일할때 저렇게 했으면 지금쯤 나같은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 있지 않을까.
막연히 눈앞의 오랜 친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당사자는 어디서 꺼내왔는지 모를 사진 몇장을 손에 들고 팔랑거리며 눈앞에서 흔들어 대고 있었다.

"안그럼 이 사진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흔들던 사진을 눈앞까지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자 보이는건 익숙한 얼굴을한 두명의 모습이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둘의 행동에 열중해 있는 모습이었다.

"아아~ 정말 장관이구마~ 홀딱 벗고 사랑에 열중하ㄴ."
"아앗~! 그만! 그만 말하라구!!"

사진 넘어로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며 힐끔 나의 반응을 살피고 있는 하야테쨩에게 더이상의 말을 하기 전에 황급히 두손을 뻗어 입을 막아버렸다. 그 뒤의 말은 차마 들을수가 없었다. 아마 들어버린다면 얼굴이 빨갛게 변하다 못해 터져버릴게 분명했다.  아니, 그전에 어째서 하야테쨩이 그런 사진을 가지고 있는거야?!

"흐흥~ 나가 누구가? 바로 하야테 아니가?"

범죄를 저지르고 그렇게 당당히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라고.... 정말로 이런 사진들을 어떻게 찍었는지. 이따가 집에 들어가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봐야 겠다. 카메라가 발견되면 아주 박살을 내버려야지.

"인질이 있으니 순순히 내말을 따라!"
"하아... 알겠으니까 그 사진좀 빨리 치워."
"부탁하신다면야~"
"정말 미안하다."
"시그넘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철없는 주인때문에 죄없는 시그넘씨가 머릴 숙이고 있었다. 저정도면 주인이고 뭐고 다 버려버리고 한대 쳐버려도 누구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을텐데 시그넘씨는 착실히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정말로 하야테쨩에겐 아까운 사람이다.

"그건 그렇고 페이트쨩도 둔하구마~"
"뭐가?"

하야테쨩은 사진은 치워버린건지 빈 두손을 설레설레 흔들면서 사과하고 있는 시그넘씨를 못본체하고 바로 옆에 앉고 있었다.

"방금 페이트쨩한테 보여준 영상 말이다. 저거 바로 어제, 아니 오늘이라고 해야하나... 암튼 방금전에 직접 본 장면이면서 전혀 눈치를 못채네~"
"하야테쨩!"

갑지기 소리를 질러서였을까. 하야테쨩은 움찔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나도 저 영상을 봤을때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 사진만이 아니라 영상까지 있는거야? 게다가 오늘 일어난 일을.... 집에 돌아가 카메라를 부수는것만으론 안되겠다. 좀더 깊은 대화를 해야지.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야 겠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준비를 시작해 볼까나~"

한가롭게 휘파람을 불며 어디론가 자신의 방에 들어가는 하야테를 보며 시그넘씨와 함께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집안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노하가 하야테의 손에 있는 지금 하야테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으니까. 조용히 앉아 나노하의 무사를 기원할 뿐이었다.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체 얼마나 있었을까. 해는 이미 져버리고 어둑한 밤의 그늘이 하늘을 뒤덮었을 때 그토록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페이트쨩. 잘 기다리고 있었나?"
"하야테..."

화면에 비친 모습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천진하게 웃고있는 하야테의 모습이 있었다. 전혀 납치를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친구의 모습에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흠... 내 말을 잘 지킨것 같으니 상을 줘야지."
".........."

하야테의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뭐가 상이란 말인가. 난 그저 어쩔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른것뿐. 나노하의 무사를 기원하며 무력하게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로 와."
"세이쇼 대학 부속....?"
"엉야.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거기말고 또 인나? 그럼 빨리 온나~"

태평하게 손을 흔들며 꺼진 화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나노하가 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 두손을 힘껏 쥐었다.

 

 

-下-

 

 

"상황은 어떠나?"

페이트쨩과의 통신이 끝난 후 바로 하야테쨩은 자신의 충실한 부하들에게 일일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명령이라고 해도 이미 페이트쨩에게 통신하기 전 각자의 위치와 할 일을 끝내놓았으니 사실상으론 확인작업과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한 행동이었다.

"이상 무~"
"아무 이상 없어요."
"이상 없습니다."
"없음! 이예요!"

지금 같은 방에 있는 시그넘씨를 뺀 볼켄리터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며 주인의 물음에 답하고 있었다.

"음음~ 그럼 모두 제자리에서 각자 맞은 역할 충실히 해주길 바란다!"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연신 싱글벙글하고 있는 하야테쨩이 얄미워보였으나 지금은 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어떻게든 인질로 잡혀있는 자료를 수거해야 하니 가만히 하야테쨩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중에 상황봐서 페이트쨩을 돕거나 해야지....
혼자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내심 고심하고 있으니 하야테쨩의 옆에 또하나의 통신화면이 켜졌다.

"응? 잠깐 하야테쨩. 지금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어요. 에... 이거 소닉폼 같은데요?"
"에? 소닉폼?"

샤멀씨의 다급한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자 지금 모든 장난의 주인공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초고의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중인것 같았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페이트쨩, 소닉폼이라니. 여긴 미드칠더가 아니라 일본이라구? 물론 미드칠더라고 해도 허가없이 쓰는건 안되지만.

"무신.. 소닉폼이라니. 여긴 지구란 말야? 마법을 쓸지도 모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소닉폼을 하고 오고 있다니..."
"저기, 하야테쨩. 지금이라도 장난이라고 말하고."
"무슨말을 하는기가?!"

깜짝 놀랐다.
하야테쨩이 저렇게 큰소리를 지르다니 별로 본적없는 모습이었다. 생소한 친구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며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그저자 하야테짱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크큭, 이거 점점 재미있어 지겠는걸? 모두! 자리 확실히 지키고 있어!"

아아.. 어떻게 해. 하야테쨩 왠지 흥분해서 들떠있어. 저렇게 되면 쉽게 말릴 수 없는데.
필요 이상으로 진지해진 페이트쨩 때문에 똑같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해버린 하야테짱이 삿대질 비슷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

"여긴 자피라. 페이트와 운동장에서 대치중."

이런, 벌써 페이트쨩이 자피라씨와 만나버린것 같았다. 제발 아무일 없어야 할텐데. 속으로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기를 빌며 한편으론 하야테쨩을 보고 있으려니 하야테쨩은 숨죽이며 가만히 자피라씨의 통신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마치 전쟁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필사적으로 알려고 하는 대장처럼. 비록 지금 하고 있는 전쟁의 모든 원인이 자신한테 있다고 해도 말이다.

"나노하는 어디있지?"
".... 그건 지금 말해줄 수 없다."

한순간 오싹 했다. 페이트쨩의 목소리엔 평상시의 상냥함이라고는 느낄수 없었다. 게다가 자피라씨한테 반말하고 있어.

"어째서 이런 일에 가담하는 거지?"
"나의 몸은 모두 주인을 위해 있다. 그러니 주인이 바라시는 일이라면 두손이 검게 물든다 하여도 상관없다."
"그런가...."

너무 진지했다. 쓸데없이 진지해. 어째서 자피라씨 연기가 그렇게나 완벽한거야? 아무리 하야테쨩의 일이라지만 너무나 완벽한 대사에 이건 장난이 아니고 실제 난 납치당한게 아닐까... 라는 착각마저 들뻔했다. 그정도로 자피라씨의 목소리는 악당의 그것이 담겨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힘으로 들을 수 밖에 없는건가."
"아아, 그렇지. 원하던 바다."

둘의 상황은 전혀 호전될 기미 없이 한판 붙기 일초전이었다. 아주 잠깐동안의 적막이 흐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진 커다란 폭발음은 둘의 상황을 더이상 알지 못하게 이곳과의 연결을 차단시켜 버렸다.

 

 

-

 

 


"자피라? 어이! 자피라!!"

화면넘어로 들려온 소리는 이젠 들리지 않았다. 페이트하고 대치한지 불과 몇분. 그 몇분만에 자피라와의 통신이 끊겨버렸다. 이럴순 없다. 우리 볼켄리터 최고의 방패가 이렇게 쉽게 당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순간 조용하던 교실 맨 앞쪽에서 드르륵, 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피라가 당한것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약간의 흙투성이가 된 페이트가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타. 나노하는 어디있어?"
"큿."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 적을 바라보는 싸늘한 표정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표정. 그리고 자피라를 쓰러뜨린 적의 표정.

"지금은 알려줄 수 없지."
"하야테의 명령때문에?"
"아아~ 그래."

하야테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알려주기 싫었다. 그만큼 나의 가슴속에는 분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타는 나노하를 지키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왜 이런일을 하는거야?"

정말로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하, 웃음이 나왔다. 별 시덥잖은걸 물어보는 페이트가 정말로 웃겼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걸까?

"바보같은 질문이군. 당연히 난 나노하도 소중하고 페이트도 소중해. 그렇다면 소중한 사람끼리 같이 있게되면 가장 좋지 않겠어?"
"............."

나의 말이 대답이 되었는지 페이트는 더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고 숨을 가다듬는 듯 했다.

"그렇군, 알겠어."
"알겠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더욱 잘 알겠지?"

그라프아이젠을 치켜 올리자 페이트 또한 바르디슈를 양손으로 단단히 쥐어잡고 있었다.
아이젠의 무게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던건 착각일까. 익숙했을 무게가 이상하게 두손을 구속시키듯 평소와는 다른 감각을 느끼게 했다.

"널 진심으로 믿었었는데."

서로 박차오르기 직전 들려온 페이트의 목소리가 아련히 귓가에 울려퍼졌다. 순간 정신이 멍하게 되었으나 뒤이어 빛난 황금색의 마력빛에 제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적을 향해 집중했다.

 


-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화면 넘어로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도 비장해서 아무 말이나 꺼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밖의 상황이 비장하다 못해 피로 철철 넘친다 하여도 사건의 원인은 슬프게도 한명의 장난일 뿐이었다.

"하야테쨩..."

걱정스레 하야테쨩을 바라보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묻어 있었고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내는게..."

조용히 비타쨩과 페이트쨩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하야테쨩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 아하하, 괘, 괜찮아. 이거 모두 예, 예상 범위 내이니.... 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저 모습을 보고 누가 믿을까. 지금 하야테쨩은 페이트쨩의 행동에 당황하다 못해 혼란을 느끼고 있는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 페이트쨩이라 해도 설마 이정도까지 진심이 되서 볼켄리터들을 전력을 다해 상대할 줄은 몰랐던 거다. 게다가 하나, 둘씩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으니 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억지를 부리는 모습은 어쩐지 가엽게 보이지 못할것도 없었다.

"정말로 그만 안할거야?"
"다, 당연하지. 한번 시작한 이상 이 하야테. 끝을 내리라."

대사는 멋들어진 결의를 표하는 말이었으나 두손이 그렇게 떨리고 있어서야.....

그순간 비타쨩의 통신에서 자피라씨의 것과 맞먹을, 아니 그때 보다 더 큰 굉음이 울리며 잠깐동안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야테는 당황해서 비타쨩의 이름을 몇번 외치길 잠깐. 잡음이 섞이며 들려온 비타쨩의 목소리는 싸움에서 진 패자의 소리를 띠고 있었다.

"하야테. 미안 졌어."
"괜찮아. 비타."

왜인지 전우의 시체를 붙들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연상되는 가운데 나는 그저 그 둘의 목소리를 묵묵히 들었다.

"지금 페이트가 하야테집쪽으로 가고 있어."
"응."
"그러니 시그넘 부탁할게."
"아아, 걱정하지 말아라."
"그럼.. 난 이만 잠깐 쉴.. 게...."
"비타, 비타!"

숨이 끊어진듯한 비타쨩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하야테쨩이 울부짖었다. 소중한 전우를 잃고 분함과 슬픔에 목놓아 울고 있는 목소리. 이세상의 모든것을 잃어버린 듯한 처절함에 자연히 목울대를 울리며 침을 한번 삼켰다.

".......... 시그넘."

하야테쨩의 울부짖음이 멈추고 고요한 적막이 떠돌고 있을때 하야테쨩으로 부터 매마른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단단히 하고 자리 지키그라."
"네, 알겠습니다."

화면넘어로 들려온 시그넘씨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하야테쨩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동료의 희생으로 인해 겉으론 조용해 보였지만 그 마음속에선 하야테쨩과 같은 종류의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을 터였다.

"샤멀과 린은 자피라와 비타를 치료하고 그대로 대기해."
"하, 하지만!"

하야테쨩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샤멀씨가 다급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야테쨩은 냉정하게 샤멀씨의 말을 자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 하야테쨩의 목소리는 냉정하지만 한편으론 얇게 떨리고 있었다.

"너희라도 무사해야 나와 시그넘이 당했을때 우리들을 돌보지 않겠나?"

조심스레 말하는 하야테쨩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샤멀씨와 린의 작은 대답을 듣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나를 바라보는 하야테쨩의 얼굴엔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고, 얼굴빛은 급속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를 향해 바라보는 시선이 묘한 불쌍함과 간절함을 느끼게 했다.

"괜찮은거야? 하야테쨩."
"그, 그럼.. 괜찮고 말고. 서, 설마 페이트쨩한테 당한다고 죽기라도 하겟나..."

아, 저거 절대로 죽을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비타쨩마저 당하고 이제서야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건지 하야테쨩의 동요가 눈에 확연히 보일정도로 심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이란게 뭔지, 하야테쨩은 곧 죽어도 페이트쨩한테 사실을 얘기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니, 있긴 하지만 애써 없다는 듯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하야테쨩과 몇마디 말을 끝으로 어째선지 더이상 말을 잊기가 거북해 서로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까지 땀을 흘릴것 같은 어색함에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을때 그 적막을 깨준건 시그넘씨의 목소리였다.

"주인, 테스타롯사가 도착했습니다."

자피라씨와 비타쨩의 시간으로 봤을때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남들에 비해선 훨씬 바른 시간에 페이트쨩은 우리들과 시그넘씨가 있는 이곳에 도착한것 같았다. 학교에 더이상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있을 가장 유력한곳인 하야테쨩의 집을 향해 바로 날아온 페이트쨩의 판단력은 딱 들어맞았다. 덕분에 옆에 있는 하야테쨩이 혀를 짧게 찼다.

"시그넘도 이번일에 가담한겁니까?"
"그렇게 됐군..."

둘의 낮은 음성이 통신 넘어에서 들려왔다.
서로가 조용조용히 말하는 편이라 언뜻 들으면 화기애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차분히 편안하게 대화하는 것 같지만 그속에 담겨있는 감정들은 서로 부딪치며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러서 주실수는 없는건가요?"
"테스타롯사,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
".........."

살벌했다. 한쪽이 말을 많이 하면 덜 할것도 같지만 둘다 말수가 적어 서로를 노려보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시그넘이 이런일에 동조하다니 실망했습니다."
"실망이라... 평소에 날 높게 평가해 준것은 고맙게 생각하지."
"........... 시그넘하고는 될 수 있으면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너는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나는 볼켄리터의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정말 서로가 원수인양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근데...... 조금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피라씨나 비타쨩이야 그렇다 치고 확실히 시그넘씨는 아침까지만 해도 나에게 미안하단 말까지 할 정도로 이번 장난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올라타고 있어 고개가 갸웃거렸다. 평소의 시그넘씨는 절대로 저런 캐릭터가 아닌데 말이다. 의문이 들어 하야테쨩을 바라보자 하야테쨩은 아까까지만 해도 벌벌 떨던 모습은 사라지고 씨익 웃으면서 오른손을 위로들어 흔들거리고 있었다. 손을 흔들자 손에 들려있던 큼직한 병과 그 속에 들어있던 액체도 따라 흔들리며 찰랑 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응? 그건 뭐야 하야테쨩?"
"큭큭. 이거 구하느라 손좀 썼제."

뿌듯하다는 듯이 가슴을 피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아나? 훗, 저번에 개인적으로 밀수품사건을 도와주게 되서 말야. 그 사례로 이놈을 손에 넣었지."
"밀수품?"
"그래. 이게 무색, 무향이지만 꽤나 독한 술이야. 게다가 맛도 달달해서 조금씩 계속 마시다간 훅~ 간다."
"에..... 설마...."
"후후후. 우리 아가들한텐 음료수랑 섞어 줘서 훅 가진 않으니까 걱정 말어."
"하아아아..... 볼켄리터들이 불쌍해..."

정말이지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어째서 이런 장난에 저정도 까지 철두철미하게 계획하는 걸까. 저 못난 주인때문에 그의 충실한 부하들은 술에 취해 분위기에 휩쓸려버려 전투를 해버리고, 게다가 당연히 술에 취해 있으니까 제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다 당해버렸다. 페이트쨩도 불쌍하지만 볼켄리터들도 이게 왠 고생일까. 하야테쨩이랑 계속 친한 친구로 있어도 될까... 하는 고민이 진지하게 들었다.
엄청난 친구의 쓸데없는 노력에 탄식하고 있자 깜빡 잊고 있던 통신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칼과 칼이 부딛치는 소리는 귀속에 강하게 박혀왔다. 몇번인가의 강렬한 마찰음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급속하게 서로의 마력을 모으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곧이어 서로의 가장 강력한 마법을 외치면서 둘의 싸움에 끝을 고하고 있었다.

"주인... 죄송합니다."
"시.. 그넘... 시그넘! 안돼, 안돼!"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저를...."
"아아.. 안돼. 시그넘마저 쓰러지면..."
"용서... 하십시요..."
"난 정말 페이트쨩한테 죽는단 말야~!!!"

여태까지 봐왔던 외침보다 가장 진심이 담기고 절실한 비명을 듣고 있으려니 거실의 창문이 깨지면서 금빛 마력이 춤을 추듯 날아왔다. 까만 밤을 배경으로 펄럭이는 하얀 망토는 무엇보다 선명해서 눈이 시렸다.
하야테쨩이 울듯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고 있자 굳게 닫힌 페이트쨩의 입술이 열리면서 단 한마디 만을 고했다.

"나노하를 돌려줘."
"자, 잠깐. 페이트쨩. 하하, 장, 장난이라니까. 장난이라구. 잠깐! 우왁! 제발 멈춰, 멈추라구!!!!"

필사를 담은 햐야테쨩의 외침은 까만 밤하늘 자신의 집이 반파되가는 소음속에 묻혀버렸다.

 

 

 

-

 

 

 

"정말 정말 미안해 페이트쨩. 응? 이렇게 사과하니까."
"하아.... 그때 얼마나 놀랐는줄 알아? 그런데 그게 다 장난이었다니..."
"미안해. 대신에 새벽까지 페이트쨩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줬잖아. 응?"
"그, 그건 그렇지만...."
"오늘도 패이트쨩이 해달라는 데로 해줄테니까 그만 화풀어~"
"정말이지.... 앞으론 그런 장난에 어울리면 안돼, 알겠어?"
"응, 응! 다신 안그럴께. 고마워 페이트쨩!"
"고마워 할거까지야...."
"응? 아, 저기 하야테쨩 보인다. 하야테쨩~!"
"아, 나노.... 히익?!"
"응? 왜그래, 하야테쨩?"
"아... 나노하쨩하고... 페, 페이트님!"
"아, 저기... 페이트님이라니......"
"두, 두분께선 여기에 뭐하러 오셨습니까?"
"잠깐 마실것좀...."
"페이트님께서는 부디 이걸로 마셔주십시오!"
"아? 저, 저기... 하야테..."
"저, 저저, 전 괜찮습니다. 이걸로 페이트님의 목이 조금이라도 축여진다면."
"하지만...."
"그럼 이 미천한 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 하야테!"
"두분 부디 좋은 시간 되세요!"
"잠깐, 하야테쨩?!"
"하야테?!"

 

by | 2011/03/21 15:38 | 소설이라 하긴 부끄럽지만 | 트랙백 | 덧글(0)

[나노하]화이트데이

시끌벅적한 상가.
왠지 평소보다 좀 더 활기 넘치는 상가에 푸른 빛을 띄는 흑발의 한 소년이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단순한 산책 정도 인지, 진열되 있는 물품들에는 별로 눈길을 주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대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2블럭정도 걸었을까. 크로노는 평소와는 다른 상가의 분위기에 약간 위화감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길거리가 달라 보이는데....'

달라보이지만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알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역시 크로노라고 할까..... 고민해 봤자 알아내지 못할거라 생각해 머릿속의 생각은 단숨에 정리되어 더이상의 무의미한 사고를 하지 않았다.

약간은 무표정으로 마저 자신의 산책을 재촉하고 있자 건물의 귀퉁이에서 익숙한 갈색머리가 찰랑거렸다.

"어이~ 나노하!"
"아, 크로노군!"

나노하는 예상치 못한 친구를 만난 반가움 때문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우면서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는 도중에 아무것도 없는 길에서 휘청여 크르노의 심장을 철렁하게 했으나 뭐가 좋은 건지 연신 싱글거리는 얼굴만은 변하지 않았다.
친구의 덤벙거리는 행동에 남몰래 한숨을 한번 크게 쉰 크로노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쇼핑중인가?"
"응! 내일이 그날이니까!"

미소가 더더욱 커지며 대답한 나노하의 말에 크로노는 제대로 따라가질 못했다.

그날이란 뭐지?
나노하의 부족한 대답에 좀더 정보를 얻기 위해 말을 하려던 순간 먼저 얘기해 버린 나노하에 의해 크로노의 말은 목구멍에서 막혀버렸다.

"아, 크로노도 그거 사려고 나온거야? 그럼 나랑 같이 둘러보자!"
"아, 저기 그러니까...."

나노하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거'란게 도대체 뭔지 감조차 잡히질 않는다.

크로노는 어느새 나노하한테 붙잡힌 팔을 어색하게 떼어놓으며 왠지 들떠있는 나노하를 달랬다.

"나노하, 들뜨지 말고 가만히 있어봐.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하는 '그거'란게 뭐야?"
"에?"

진지하게 묻고있는 크로노의 표정에 나노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몇초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예상 외의 질문을 한것일까?
나노하는 머릿속에서 정보의 정리가 되지 않는지 눈만 뻐끔 거렸다.

"저기 크로노군. 정말로 모르는 거야?"

어째선지 크로노의 눈치를 살피면서 나노하는 조심스럽게 되묻고 있었다.
크로노는 당연하게 고개를 크게 끄덕여 자신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나노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엄청난 속도로 크로노의 앞까지 바짝 붙여왔다.

"에에~ 거짓말! 크로노군, 내일 무슨날인지 모르는 거야?"
"모르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게....."
"말도 안되!"

눈앞에서 터져나온 고함에 크로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 졌다.
오랫동안 눈앞의 소녀와 알고 지냈지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생소했다. 알지 못하는 친구의 모습에 크로노는 적잖이 당황하며 잔뜩 흥분해 있는 나노하를 달래기 위해 버벅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꺼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거'란게...."
"크로노군! 저번달 에이미씨한테 초콜렛 받았어?"
"응? 초콜렛?"

여태까지의 대화와 전혀 상관없는 주제의 등장에 크로노는 의아해 하면서도 성격때문인지 나노하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 위해 착실히 생각에 잠겼다.
에이미와의 수많은 추억중에서 나노하가 원하는 기억을 찾기 위해 머릿속을 열심히 뒤적였다. 그러자 얼마 안가 크로노의 명석한 두뇌에 하나 걸리는 기억이 바로 생각났다.

"아아... 그러고 보니 한달쯤 전에 초콜렛을 받았었지... 내가 별로 단건 안좋아 하는 데도 한보따리로 줘서 곤란했었어."

그때 에이미의 이상한 행동때문에 크로노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잘 주지도 않던 초콜렛을 어째선지 그날따라 엄청나게 줬었다. 너무 많아 다른 사람한테 나눠 주자 왠지 표정이 우울해져선 왜그러느냐고 물어봐도 대답해 주지도 않고.
결국엔 그 많은 초콜렛을 혼자 다 먹느라 꽤나 고생했었다.

힘겨운 지난날을 생각하자 속이 안좋아 졌는지 크로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배나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혹시 1년 전에도 받지 않았어?"
"1년?"

자신의 대답으로 끝날줄 알았던 초콜렛 이야기가 아직도 안끝났는지 나노하는 초콜렛 이야기를 열성적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확실히 1년 전에도 1달 전과 같은 일이 일어났던것 같기도 하다.
활발한 평소와는 다르게 우물쭈물 거리면서 손에 들려있는 것을 건네주기에 뭔가 하고 찬찬히 살펴봤지만 눈에 보이는건 평범한 초콜렛.
예상과는 다른 물건에 대한 생각이 표정에 나왔는지 몇대 때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어째서 비슷한 시기에 그렇게나 많은 초콜렛을 줬던걸까.
크로노는 문득 스치는 의문에 머리를 갸웃 거렸다.

"응. 있었던것 같은데. 초콜렛."
"그럼 초콜렛 받고 답례는 했어?"
"답례라니...."

초콜렛을 받고 답례를 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초콜렛이 귀한거였나.
뭔가를 받았으니 그에 따른걸 줘야 한다는건 알겠지만 뭔가 다른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답례라고 할까. 나도 에이미한테 먹을거나 작은 선물같은건 몇번 하는데..."
"크로노군 바보!"
"뭐, 뭣?!"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친한 친구에게 바보라는 소리를 들은 크로노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별로 잘못한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크로노는 바보라고 들은 억움한 때문에 억양이 조금 높아져서 계속 바보,바보라고 하는 나노하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내가 왜 바보라는 건데? 뭐야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설명좀 해달라고."
"흥, 에이미씨가 불쌍해."
"거기서 또 왜 에이미가 나오는 건데?"

아까부터 나노하를 따라 갈수가 없다. 뭔지 설명을 해줘야지 알것 아닌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아무런 설명없이 천하의 나쁜놈이 될것 같은 기분에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나노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야? 설명을 해줘야 알지."
"크로노군, 발렌타인데이란거 알아?"
"발렌타인데이?"

어디선가 들어본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은 단어의 울림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익숙하지만 생소한 기분. 지구의 어떤 날 이란것 까진 대강 유추해 볼 수 있겠지만 더이상은 무리였다.

"아니, 잘 모르겠어."

크로노는 솔직히 지식의 한계를 인정했다. 여기서 괜한 오기를 부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척 하는건 크로노의 성격이 아니었다.

"바보."
"윽."

하지만 솔직한 태도에서 돌아오는건 나노하의 싸늘한 대답.
괜히 모른다고 말했나 하고 살짝 후회가 밀려왔지만 가만히 나노하의 다음얘길 기다리기로 했는지 크로노는 얼굴을 구기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발렌타인데이란건 2월 14일. 그날 여자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렛을 주면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날이라구!"
"초콜렛에.. 고백?!"

대, 대체 나노하가 무슨말을 하는거야?!
그, 그러니까 한달 전쯤에 에이미가 초콜렛을 줬고, 그날은 발렌타인데이고, 그리고 그건 고... 고....
우아아아악! 더이상은 말하기 힘들어!

"어때? 대충 알겠어?"
"으, 응...."

나노하는 팔짱을 낀채 곁눈질을 하며 크로노를 흘겨보고 있었다.
크로노는 이해한 시점에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여서는 터지기 일보직전. 항상 냉정, 침착한 크로노에게 있어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기에 아마 이곳에 크로노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병원에 신고하자고 난리를 치지 않을까?

"그리고 발렌타인데이에서 한달 뒤인 3월 14일이 화이트데이. 바로 내일말야. 이날은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사탕을 주면서 고백하는 날이라고."
"나, 남자가.... 고백..."

나노하의 추가 타격에 터지기 직전의 크로노의 얼굴에선 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하, 하지만 난 그게.. 에이미를 딱히 좋아하는건...."
"응? 무슨말 했어?"
"아, 아니........"

어찌어찌 정신을 차리고자 반격을 시도한 크로노의 말은 나노하의 입은 웃고있지만 눈이 웃고있지 않은 무시무시한 표정 앞에 힘없이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미련을 못버렸는지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중얼 거리는 크로노를 못본체 하며 나노하는 축 쳐져 있는 크로노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러니까 크로노군도 화이트데이때 사탕 줘야지."
"..........응."

작지만 긍정을 뜻하는 크로노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나노하는 살짝 웃으면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덕분에 자신보다 어린 여자한테 질질 끌려가는 상태가 되었지만 머릿속의 이런저런 혼란으로 크로노는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발을 움직였다.

"에이미씨는 뭘 좋아해?"
"글쎄... 단건 다 좋아하는데. 사탕보단 초콜렛을 더 좋아할걸?"
"그래? 그럼 초콜렛으로 하자."
"하지만 화이트데이는 사탕을 주는거 아냐?"
"그렇긴 한데... 별로 꼭 그렇다고 정해진건 아니니까. 이런건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하아...."

마음이라....
꽤나 그럴싸한 말이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굳이 무슨무슨 날을 따지는건 의미가 없는게 아닐까?

혼란이 조금은 가셨는지 혼자 조용히 태클을 걸었지만 역시 명석한 크로노는 입밖에 내질 않았다.

"그런데 나노하는 뭘 사려고 온거야? 나랑 어울려도 괜찮아?"
"응? 아아, 응 상관없어. 나도 페이트짱한테 만들어줄 초콜렛 사러 온거니까."
"페이트?"

초콜렛을 사러온게 사실인지 나노하의 손목에 걸려있는 속이 비쳐보이는 비닐봉투 안엔 초콜렛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두개정도 들어 있었다.

"근데 왠 초콜렛?"
"사실 발렌타인데이때 내가 본국에 일이 있어서 페이트짱한테 초콜렛을 못줬거든. 며칠 지나서 주긴 했지만."
"그래서 발렌타인데이 대신에 화이트데이로?"
"응. 내용물은 초콜렛이지만."

부끄러운 건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는 나노하의 얼굴은 양 볼이 발갛게 변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노하와 페이트는 사이가 좋은것 같다. 가끔씩 도가 지나치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일이겠지.

크르노는 자신의 동생이랑 친하게 지내주는 눈앞의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게 오빠 마음이라는 걸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어색했지만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었다.

"자, 그럼 얼른 사서 우리집에 가자! 내가 만드는거 도와줄게."
"만들다니? 언뜻 보니까 완제품도 파는거 같던데."
"안돼! 여태까지 못준만큼 정성들여서 준비해야지!"
"하지만 난 그런건 만들어 본 적 없는데."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하, 하지만."
"자, Let's Go!"
"나노하 잠깐!"

이미 페이스를 올려버린 나노하를 향해 무의미한 절규를 하는 크로노는 역시나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나노하에게 끌려가 버렸다.

 

 

 

 


통, 통, 통- 부엌에서 경쾌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도마를 두들이는 부엌칼은 칼이라는 섬뜩한 단어에는 어울리지 않는 즐거운 동작으로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도마와 칼의 합주소리에 이어 약간 위쪽에서 작은 콧노래가 들려왔다.
요리를 하는것이 기쁜지 얼굴엔 미소를 띄우면서.

"엄마, 오빠가 어디있는지 아세요?"

부엌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계단에서 금발머리의 소녀가 걸어오며 소리쳤다.
페이트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린디를 향해 걸어갔다. 예전이라면 크게 말하면서 걷는건 하지 못할 것 같던 소녀였으나 시간이 흘러 한결 유연해진 페이트였다. 사랑스러운 딸의 작은 변화에 미소를 띄우면서 린디는 상냥하게 말했다.

"글쎄... 잠깐 산책하러 간다고 나갔는데 아직 안왔나 보네. 곧 저녁식사 시간인데."
"그런가요."

결국 크로노의 행방은 모른다는 거였다.

전에 우연히 크로노의 방에서 본 책을 읽어도 되는지 물어보기 위해 크로노를 찾은 거였지만 이렇게 된다면 다음에 읽어야 겠다.
허락없이 읽었다고 화를 낼 크로노는 아니었지만 이런 작은 에티켓은 지키는게 좋겠지.
페이트는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몸을 돌려 부엌을 빠져 나가려고 했다.

"아, 크로노라면 나 밖에서 봤는데."
"알프가?"

작은 어린아이로 변한 알프가 어디서 얻었는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있었다.
우물거리는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졌는지 페이트는 한껏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상가에서 봤어. 나노하하고 같이 있던데?"
"오빠하고 나노하가 같이 있었어?"
"응!"

별일이네. 오빠하고 나노하가 같이 있다니.
같이 있는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특별히 둘이서만 만날 사이도 아니었기에 의외였다.
페이트는 눈썹을 까닥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밖에서 우연히 만난걸까?

"근데 둘다 얼굴을 빨갛게 하고 있던데? 그러고는 나노하가 크로노를 끌고 어디론가 가버렸어."
"응? 얼굴을 빨갛게?"

알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예상 외의 말에 페이트는 마음이 쏠렸다.
어째서 둘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같이 있었던 걸까. 어째서...

대화에 나노하가 나온 시점에서 사고가 둔해진 페이트는 알프의 발언으로 급속도로 기능이 쇠퇴해 가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었지만 페이트는 보통 사람들 보다 심하게 사고가 흔들려 갔다.

잘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들어 무심히 집안을 살펴보고 있던 중에 달력이 페이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퍼뜩 어느 생각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오늘은 13일, 내일은 14일. 즉 화이트데이. 그렇다면 설마 나노하가 오빠를.... 아니, 아냐. 그런일은... 하지만 설마가 사람잡는다기도 하고.... 아냐. 화이트데이는 내일인데 왜 오늘 만나겠어. 산책하던 오빠가 우연히 나노하를 만난거 뿐이야. 근데 얼굴을 붉히고선, 그렇단건 둘이 뭔가가 있다는 건데.. 아니, 딱히 뭔가가 없어도 얼굴정돈 붉힐 수 있는 거잖아. 이유도 없는데 얼굴을 붉힐리가 없어! 그래도, 혹시.. 하지만... 아냐, 그래도 착각이면....

갖가지 표정으로 이리저리 변하는 페이트의 얼굴을 알프는 감상하고 있었다. 그저 재밌다- 란 생각을 하면서.

"그럼 전화라도 해보는게 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에이미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었다.
역시나 연장자의 연륜이랄까. 손쉬운 방법을 제시하고는 또다시 어디론가 휘릭 사라져 버렸다. 에이미도 크로노를 좋아할 터인데 이정도의 사건으로는 아무 지장도 없나보다. 페이트는 그런 에이미의 행동에 작은 존경심을 느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면 전화를 해 확인해 보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간단한걸 생각해 내지 못한건 결코 페이트의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남들에 비하면 두뇌는 명석했고 결단력, 행동력 모두 뛰어나니까. 단지 나노하 한정으로 페이트는 자신의 장점을 마음껏 활용하지 못하는것 뿐이었다.

페이트는 손을 재빨리 움직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찾고있던 휴대폰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몸에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방안, 책상 위에 고이 놓여져 있을 휴대폰을 생각해 냈다. 뛰다싶이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다. 정면에 보이는 책상을 향해 다가가자 반듯하게 놓여있는 휴대폰이 보였다.

페이트는 단축번호를 눌러 간편하게 크로노에게 통화를 걸었다.
뚜루루- 하는 신호음이 울린다. 하지만 신호음이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끝내 자동메세지로 넘어갈 때까지 크로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차례 더 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일부러 페이트의 전화를 피하는지 아님 못받는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페이트는 초조해졌다.

발을 두어번 바닥에 툭툭치고선 고심한 끝에 나노하에게도 전화하기로 맘먹었다.
단축번호를 누르자 아까전과 같이 간편하게 통화음이 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수화기 건너편에서 나노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왜 안받을까....."

한명이라면 모르겠지만 두명다 안받으니 초조함은 엄청난 기세로 페이트의 몸을 잠식해 갔다. 진정하지 못하고 두리번 거리는 페이트는 주인없는 강아지 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나노하 집에 걸어볼까...."

휴대폰을 열었다. 하지만 망설여 졌는지 페이트는 손가락을 움직이질 못했다. 나노하집에 걸었는데 크로노도 같이 있으면 어떤 반응을 하면 좋을까.

페이트는 손가락을 번호판 위에 올려놓았다 뗐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랬을까.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페이트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면서 번호판을 꾹 눌렀다. 그러자 익숙한 신호음이 들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타카마치 입니다~"
"아, 미유키씨."
"페이트짱?"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유키는 오랜만에 들은 페이트의 목소리가 반가웠는지 한껏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잘 지냈어?"
"네. 미유키씨는요?"
"응,응~ 나도 잘 지내지~"

페이트와 미유키는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은뒤 미유키의 잡담으로 넘어갔다.
남의 대화를 잘 끊지 못하는 페이트로서는 미유키의 말을 계속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어색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상대해 주자 어느정도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미유키가 그제서야 자신이 전화한 목적의 인물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 나노하짱 바꿔줄까?"
"네, 부탁드릴게요."
"응, 잠깐 기다려봐~ 나노하짱! 페이트짱 전화!"

수화기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소리치고 있겠지만 수화기 건너편으로 외치는 목소리가 다 들려왔다.
언제나 기운이 넘치는가 보다.

외침이 있은지 십몇초 후에 나노하가 왔는지 나노하와 미유키의 잡담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페이트짱 전화. 아, 크로노하고는 잘 되가?"
"응, 그럭저럭?"

자, 잠깐!
지금 누군가의 이름이 들렸던것 같은데..!

걱정하던 일이 점점 현실이 되는것 같은 상황에 페이트는 수화기 너머로 소리칠뻔 했지만 어떻게든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참아내고 있었다.

"페이트짱, 전화했어?"
"으, 응. 저기 지금 크로노랑 같이있어?"
"어떻게 알았어? 크로노군 바꿔줄까?"

페이트는 천진한 나노하의 물음에 작게 대답하고는 묵묵히 기다렸다.
감이 멀지만 나노하의 외침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로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페이트?"

크로노의 목소리는 어쩐지 어색하고 당황하는 듯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들키면 안될것 같은 분위기가 묻어있는 소리에 페이트는 전화를 하기 전보다 더 초조해져 갔다.

"나노하집에 있었던 거야?"
"아아... 뭐, 그렇게 됬어."
"알프가 낮에 오빠가 상가에 나노하랑 같이 있는걸 봤다고 했는데."
"뭐?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뭐가 그리 당황스러운지 크로노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아무리 당황하더라도 침착하게 있던 크로노였는데 평소 보이지 않던 일면을 보여주니 페이트는 안정되질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안좋아 지는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저 우연히."
"크로노군! 빨리 와봐! 여기 이렇게 해놓고 가면 어떡해!"
"아, 알았어! 미안, 페이트. 잠깐만.."
"에, 오빠?"

크로노는 나노하의 외침에 페이트의 말도 듣질 않고 다급하게 수화기를 탁자에 올려놓고 떠나버렸다.
그렇게나 나노하가 중요한가? 동생의 볼일을 제껴버릴 만큼?

탁자위에 놓은 수화기는 꺼지지 않고 멀리서 들려오는 나노하와 크로노의 목소리를 여과없이 페이트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크로노군. 좀더 상냥하게 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분명히 나한테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하지만 이런거 처음이기도 하고..."
"안돼! 마음을 담아서 해야지. 이제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거잖아? 그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돼."
"그렇긴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데 상대방이 답해주지 않으면 무척 슬플거야."
"아, 알겠어! 열심히 할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나노하와 크로노의 대화는 페이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대화 중간중간에 들려온 어떤 단어들이 페이트의 가슴과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생각을 계속하다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거 같았다. 그리고 대화를 더이상 듣기도 힘들었다.
페이트는 고개를 숙인체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몇번은 와봤지만 그다지 익숙하지 않는 나노하의 집구조를 두리번 거리면서 나노하의 목소리를 따라 크로노는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목표로 하던 부엌은 금새 눈앞에 나타났다.

"왜 부른거야?"

크로노가 다급하게 다가가자 나노하는 어째선지 볼을 부풀리고선 불만어린 시선으로 크로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만들고 있던 초콜렛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크로노군. 좀더 상냥하게 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분명히 좋아한다고 그랬잖아?"

나노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크로노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초콜렛이 상당히 제멋대로 여러모양의 틀속에 들어가 있었다.
아니, 쳐박혀 있다고 말하는게 좋을까.
여기저기 흘러나오고 묻어있어서 처참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건거 처음이기도 하고..."
"안돼! 마음을 담아서 해야지. 이제서야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거잖아? 그럼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돼."
"그렇긴 하지만..."

나노하의 발언에 크로노의 얼굴은 상가때처럼 또다시 붉어졌다.

상가에서 나노하와 만나 쇼핑을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보니 크로노 자신도 모르게 본심이 튀어나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옆에 있어 에이미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던 크로노의 마음. 그건 다른사람들이 본다면 당연히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알지못하고 어영부영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나노하 덕분에 간신히 깨달았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을.

그 사실을 알았을때 크로노의 상태는 가관이었다. 가만히 서있어서 엄청난 속도로 말을 더듬으며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으니까.
머리는 명석하지만 연애쪽으로는 완전히 죽어있는 크로노는 그렇게 한동안 패닉상태였다.

크로노의 그런상태를 나노하가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집에 데려온게 1시간 전. 집에 와서도 안정하질 못해 바로 초콜렛 만들기는 하지 못하고 또다시 시간을 지체하고 겨우 초콜렛을 만들기 시작한게 30분 전쯤이다.
크로노는 그사이 어느정도 안정되었는지 착실히 나노하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나는 좋아하는데 상대방이 답해주지 않으면 무척 슬플거야."
"아, 알겠어! 열심히 할게!"

풀죽어 연기하는 나노하에 크로노는 어쩔줄 몰라하며 초콜렛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노하가 저런 행동을 할때마다 크로노는 에이미가 떠올라서 곤란했다.
지금와서 자세히 생각해보니 에이미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게 꽤나 여러번이었던것 같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은 무심한 반응이나 하고.
그때마다 상처받았을 에이미 생각에 크로노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 이번엔 자신이 답해줘야 겠다는 생각에 나노하의 말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틀에 묻은건 깨끗이 닦고 다시 예쁘게 담는거야."
"알겠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자그마한 틀에 방금전에 녹인 초콜렛을 부었다.
자칭, 타칭 타카마치가 특제 비법이 들어간 초콜렛은 달콤한 향기를 부엌 가득히 흩뿌리며 틀에 안착했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냉장고에 넣고 다른걸 만들자!"
"또 만드는 거야?"
"당연하지!"

생각없는 크로노의 질문에 나노하는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크로노는 왜인지 혼만 나는것 같았지만 명석한 두뇌를 갖고있는 크로노는 역시 불평같은건 하지 않았다.

"잠깐. 나 페이트랑 전화가 안끝나서 다시 전화받고 올게."
"아, 응."

틀에 얌전히 담겨있는 초콜렛들을 냉장고에 조심스레 밀어넣고선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수화기는 아까전에 자신이 놓은 모습 그대로 탁자 위에 놓여져 있었다.

"여보세..."

하지만 수화기에서 들려오는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기계음이었다.

"어라? 페이트가 끊었나?"

크로노는 수화기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상관없겠지. 집에서도 볼 수 있고."

온통 초콜렛에 집중되있는 크로노는 별 생각 없이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후로도 부엌은 난장판의 연속이었다.
이런일은 처음하는 크로노로선 도무지 손에 익질 않아 실수 연발이었기 때문이었다.
초콜렛을 불에 직접 녹여 태워먹기도 하고 틀에 채워 넣으라니까 아예 들이 붇고 초콜렛을 감쌀 초콜렛 가루를 터뜨리기도 했다.
타카마치 부엌이 생긴 이래로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크로노의 초콜렛은 작은 사각형의 초콜렛 몇개와 두손바닥 사이즈의 하트모양의 초콜렛이 한개.
그 위에 I love you라고 써져 있었다.

"저기, 나노하. 이거 좀 그렇지 않아?"
"그런가? 하지만 난 좋다고 생각되는데. 크로노하고 에이미씨한텐 그정도가 좋아. 응."

나노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론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직접적인게 좋은거야. 크로노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잘 안될거 같은걸."
"으윽....."

나노하의 지적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하고 크로노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일은 어쨌든 나노하가 선배니까 얌전히 따르자. 비록 부끄러워 죽을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안먹었네. 먹고갈래?"
"아니, 됬어. 초콜렛냄새 때문에 속도 별로 안좋고."

장시간 동안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초콜렛을 바라보며 먹기도 하고 냄새도 계속 맡고 있어서 속이 별로 않좋았다.
나노하는 간단히 크로노의 상태를 받아들이고는 문밖까지 배웅을 나갔다.

"내일 잘해야되! 파이팅!"
"알았어. 오늘 고마웠어."

두손을 불끈 쥐고있는 나노하를 뒤로하고 크로노는 자신이 만든 초콜렛이 들어가 있는 상자를 품에 꼭 껴안으며 걸어갔다.
내일 일어날 일에 긴장을 잔뜩해 어정쩡한 몸을 이끌면서.

 

 

 

어쩐지 피곤해진 몸을 간신히 이끌고 집앞에 도착했다.
겨우 초콜렛을 만들었을 뿐인데...

심호흡을 한번 깊숙히.
크로노는 꼭 끌어앉고 왔던 초콜렛 상자를 다시 외투 안쪽으로 집어넣어 티나지 않게 옷매무새를 고쳤다.

잠금장치를 간단히 해제하고선 집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던 에이미가 큰소리로 맞이해 주었다.

"크로노야?"
"으, 응. 나왔어."

크로노의 대답에 편하게 널부러져 있던 에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신발을 벗고 발을 내딛던 크로노는 갑작스런 에이미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그만 초콜렛 상자를 떨어뜨릴 뻔 했다.
허둥대는게 눈에 뻔히 보이는 행동이 에이미의 눈썰미를 가늘게 만들어 버렸다.

"왜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니, 별로..."

조마조마 했다.
초콜렛을 지금 들키면 안된다. 내일 정식으로 에이미한테 건내줘야 하니까.

크로노는 두근거리는 심장이 빨리 진정되길 바라면서 에이미의 눈치를 살폈다.
에이미는 의심쩍은 눈초리를 했지만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지 다행이도 금세 거실로 되돌아 갔다.

"하아...."

크로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나왔다.
흘끗, 에이미가 앉아 있는 쇼파를 한번, 다시 초콜렛 상자를 끌어안으며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페이트는?"
"저녁먹고선 방에 들어가던데? 그 이후로는 못봤어.. 잠이라도 자고 있나?"
"알았어."

크로노는 부엌 옆에 자리하고 있는 계단을 올라 먼저 자신의 방에 들어가 초콜렛 상자를 재빠르게 이불 속으로 숨겼다.
이불을 매만지며 티나지 않게 고친후 몸을 돌려 페이트방으로 향했다.

나노하 집에 있을때 전화를 마저 못했으니 만나야 할것 같은데, 에이미의 말에 따르면 자고 있을 확률도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크로노는 약하게 페이트의 방문을 노크하고 대답이 없으면 페이트를 만나는걸 포기하기로 했다.
먼저 자버렸다는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것이다.

살금 페이트방 앞으로 다가간 크로노는 똑똑, 방문을 두번 두드렸다.
역시나라고 할까, 페이트의 방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자고있나 보네."

그렇게 결정을 내린 크로노는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 갔다.
이불을 걷어 상자를 바라본다.

리본으로 만든 하트가 붙어있는 상자를 보자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다시 이불로 덮어버렸다.
하지만 크로노의 머릿속에선 초콜렛이 녹아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피어올라 하는 수 없이 이불을 들쳐올려 초콜렛 상자를 꺼냈다.

책들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으로 다가간 크로노는 책들을 빼버리더니 초콜렛 상자를 그속에 감추고는 바깥을 책으로 덮어버렸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크로노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흘끔 흘끔 상자가 감춰져 있는 책장을 살펴봤다.
어쩐지 진정이 되지 않는다. 잠도 오지 않을거 같고.
오늘밤은 길게 느껴질것 같다.

 

 

 

 

잠든 의식이 서서히 깨어가기 시작했다.
창 밖은 해가 어느정도 나와있어 아침도, 점심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었다.
왠일인지 크로노는 그런 어정쩡한 시간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하지만 늦게 일어났음에도 눈엔 피로가 가득해 보여 피곤해 보였다.

"잠을 별로 못잤네....."

작게 중얼거린 크로노는 고개를 두어번 흔들고선 어제 자신이 숨겨놓았던 초콜렛 상자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이것을 에이미한테 건내줘야 한다.
사실 잠을 설친것도 이것을 어떻게 건네줘야 할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었다. 결국 좋은 해결책 같은건 떠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에이, 모르겠다."

모든것을 체념한듯 크로노는 아래층에 내려가 씻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들이부으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하는 기대감에서 였다. 허나 찬물을 부어도 매한가지. 달라지는건 없이 정신만 또렷해져 긴장감만 상승해갔다.

"이제 일어난거야?"

터덜거리며 화장실을 나오자 에이미가 부엌에서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는 인물과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면에 크르노는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필이면 지금 만나다니. 좀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한웅큼 불만이 속으로 터져나왔다.

"크로노?"
"아, 아.. 응. 어쩌다 보니 지금 일어났네.."

어딜봐도 어색함이 뚝뚝 떨어지게 크로노는 대답하고 있었다. 에이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상체를 숙였다.
때문에 크로노의 얼굴 가까이에 에이미의 얼굴이 쑥, 하고 내려오게 되었다.

"뭐, 뭐하는 거야?!"
"응? 아니 뭐... 상태가 안좋아 보여서 말야. 살펴볼까 해서."
"난 괜찮아!"
"괜찮아 보이진 않는데....."

지레짐작으로 놀란 크로노는 안절부절 못한상태로 울쌍이 되어 에이미를 바라봤다.
에이미는 에이미대로 어딘가 이상한 크로노때문에 걱정이 됐는지 눈썹을 모으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되겠다. 이상태로 가다간 뭔가 더 상황이 않좋아 질 것 같아.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무의식중에 저런 결론에 달한 크로노지만 딱히 이곳을 요령좋게 빠져나갈 인물은 못되는 크로노기에 어찌하지도 못하고 머릿속만 하얗게 변해간 끝에-

"에, 에이미! 여기서 꼼짝 말고 서있어!"

지금의 상황을 모면한다고 말한 대사가 고함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외침과 동시에 에이미의 상태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쿵쾅거리며 두세단씩 올라가는 크로노의 모습은 남자아이에게서 나오는 박력이 서려있었다. 에이미는 벙찐 표정으로 눈앞에서 사라진 크로노의 말대로 가만히 서있었다. 왜인지 어정쩡한 모습으로.

위층에 뛰어간 크로노는 단숨에 자신의 방으로 뛰쳐가 고이 보관했었던 초콜릿 상자를 누군가에게서 뺏다시피 낚아 챘다. 저렇게 난폭하게 다루다가 안의 초콜릿이 모두 박살나 버리는건 아닐까, 싶을 만큼. 그 초콜릿을 만든 당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올라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올때도 쿵쾅거리며 뛰어 내려온 크로노의 손에는 약간은 구겨져 있는 상자가 들려있었다.
순식간에 다녀온 크로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별거아닌 거리였지만 다른 의미로 흥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손에 든건 뭐야?"
"아, 그...."

에이미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점점 울쌍이 되어가고 눈동자는 방황하며 이리저리 움직여 갔다.
전해줘야 한다. 전해줘야 하는데 긴장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저 건네주기만 하면 될텐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이런 단순한 것조차도 할 수 없다니 여태까지 헛살아온것은 아닐까.

속으로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크로노는 팔을 들었다 놨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얼굴을 울그락 불그락하면서 가만히 있질 못했다.

크로노의 이상한 행동에 에이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
에이미의 손이 크로노의 볼에 닿기 직전에 크로노의 얼굴이 들어올려지면서 크게 입을 열었다.

"이거! 받아줘!!!"

크로노는 외침과 함께 상체를 90도 가까이 숙이면서 상자를 두손에 들고 에이미를 향해 쭉 뻗었다.
아랫사람이 볼수조차 없는 사람을 향해 무언가를 바치는 것 같은 모습.
돌연 그런 이상한 상황에 에이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움찔거리며 손을 움직여 두손에 움켜져 있는 상자를 조심스레 받았다.

크로노는 자신의 손에서 상자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숙였던 상체를 되돌렸다. 그러고는 부릅뜬 눈으로 에이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렬한 눈길을 받은 에이미는 뒤로 한발자국 본능적으로 물러나 버렸다.

"지금 열어봐도 되?"
"......응."

여전히 얼굴표정을 풀지 않는 크로노를 경계하듯이 살펴보면서 에이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구겨져 있는 상자는 무시하면서 포장지를 뜯어내자 투명한 유리상자가 있고 그속엔 별모양이 새겨져 있는 비닐봉투안에 고이 감싸여 있는 초콜릿 몇개와 또다른 상자가 들어있었다.

"크르노 이거..."
"그, 다, 다른 상자도 푸, 풀어봐."

크로노의 말에 에이미는 속에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고선 유리상자를 바닦에 내려놓았다. 갈색의 종이상자를 열고 있는 에이미의 양볼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한번 작게 숨을 쉬고 닫혀있는 상자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까만 상자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들어내는 내용물은 귀엽게도 하트모양을 하고 있어서 에이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상자속의 내용물은 까만 하트모양 위로 하얀색의 글씨가 삐뚤빼뚤하지만 한자한자 조심스레 적혀있었다.

"I love you..."

에이미는 눈으로 글씨를 따라가면서 거의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조그마하게 읊조렸다.
크로노는 작지만 확실히 자신의 마음을 읽어준 에이미의 목소리에 경직된 자세로 얼굴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크로노군...."

천천히 올려진 에이미의 눈가엔 방울만한 눈물이 또르륵 흘러 내려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울고 있으면서 웃고있는 얼굴은 볼썽사나웠지만 지금 크로노의 눈엔 누구보다 예쁘게 보였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니까.

"크로노군...!"

다시 크로노의 이름을 되뇌이며 에이미는 크로노를 향해 안겨왔다.
두손을 크게 뻗어 크로노의 목에 둘러 얼굴을 맞대 껴안았다. 덕분에 에이미의 눈물이 크로노의 뺨이며 어깨에 닿아 젖어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느때보다 가까이 있는 지금 크로노는 에이미의 작게 떨리는 몸이 충분히 느껴져 왔다. 기쁨때문에 떨리는 몸을.
크로노는 조금더 느끼고 싶어 에이미를 꽉 껴안았다. 자신의 고동도 충분히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면서.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행복하다.
작은 선물 하나로, 작은 용기 하나로 이런 기분을 맞볼 수 있다면 나중에 또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
그때에는 좀더 멋있게 줄 수 있을까? 지금보다 당당히, 에이미가 더 기뻐할 수 있게.
그때가 올때까지 지금의 마음을 소중히 하자. 나의 품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 another couple story~~~~~~~~~~~~~~~~~~~~~~~

 

 


"페이트짱~ 여기, 여기~!"

낮은 언덕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얌전히 앉아있던 나노하는 기운차게 일어나 멀리서 뛰어오는 페이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별로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집에서 부터 뛰어왔는지 페이트의 이마엔 쌀쌀한 날씨임에도 땀이 베어 있었다.
나노하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자 페이트는 바쁘게 움직이던 다리를 좀더 빨리 움직여 나노하를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뛰어오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그냥 페이트짱네 집에 갈걸 그랬나봐."
"아냐, 별로 안뛰었어. 괜찮아."

나노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페이트를 향해 말하자 페이트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면서 달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부드럽게 웃는 얼굴. 하지만 그런 페이트의 얼굴엔 어째서인지 쓸쓸함이 묻어나오는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의 초콜렛을 줄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차있던 나노하는 평소라면 깨달았을 페이트의 작은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해맑게 웃고만 있었다.

"페이트짱, 여기 이거. 선물이야."
"선물?"

뒤로하고 있던 한손을 앞으로 활기차게 내뻗는 나노하의 손엔 분홍색의 리본이 묶여있는 하얀 상자가 쥐어져 있었다.
페이트는 뜻밖의 선물에 놀라면서도 선물의 기분좋음에 얼굴을 상기시키며 건네받았다.

조심스레 리본을 풀었다. 포장지도 최대한 구겨지지 않도록.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이.
몇번의 손길을 거치자 포장지속에 숨어있던 상자는 모습을 들어냈고 고이 닫혀있던 뚜껑을 열었다.

다양한 모양의 초콜렛들. 아기자기한 초콜렛들이 각각 비닐에 쌓여 상자 가득 담겨 있었다.

"초콜렛?"
"응. 발렌타인데이때 초콜렛 못줬잖아. 그래서 대신이라고 할까.... 다른날에 줬지만 아무래도 그날 못준게 마음에 걸렸었거든."

얼굴을 숙이면서 말하는 나노하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귀가 빨개 있어서 쑥스러워 하고 있다는게 충분히 전해져 왔다.
이렇게 선물을 주고 받는건 지금까지 많이 해온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노하는 줄때마다 얼굴이 금세 달아오른다.
페이트는 나노하의 변함없는 행동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하나하나 포장되어있는 초콜렛중에 제일 위에 나와있는걸 하나 집어들어 쏙하고 입에 넣었다.
페이트의 입맛을 생각한건지 너무 달지 않은 초콜렛은 약간 씁쓸하면서도 그윽하게 입안에 맴돌았다.

"어때? 괜찮아?"
"응, 맛있어. 어떤 초콜렛보다도."

페이트가 활짝 웃으면서 얼굴을 가까이 하자 나노하는 기쁜지 얼굴이 풀어져 갔다. 흘러나온 작은 웃음소리엔 즐거움이 묻어있었다.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나노하가 만든 초콜렛을 나눠먹고 있자 나노하는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두손뼉을 치면서 페이트를 향해 고개를 홱하니 돌렸다.

"맞다! 오늘 크로노군, 에이미씨한테 초콜렛 줬어?"
"오빠?"

돌연 다른인물의 등장에 페이트는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되묻고 있었다.
크로노라는 인물. 오늘 나노하한테 전화오기 전까지 머릿속 한구석에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인물의 등장. 페이트는 또다시 기분이 우울해 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노하의 물음에 착실히 대답하기 위해 입을 움직였다.

"글쎄, 내가 나올땐 오빠는 아직 자고 있었거든. 그래서 잘 모르겠어."
"우웅.... 그래? 꼭 전해줘야 할텐데."
"무슨 일인데?"

볼을 부풀리며 고민하고 있는 나노하에게 참지못하고 궁금한것을 물어보았다. 더이상 혼자 끙끙대봐야 알 수 없는건 알 수 없는거고. 하루동안 지쳐버렸다고 해야 할까, 눈앞의 나노하를 보니 어쩐지 고민하고 있는게 한심하다고 느껴져 버렸다.

"사실 어제 초콜렛 재료를 사면서 크로노군을 만났거든. 그래서 크로노군이랑 같이 초콜렛을 만들었어. 나는 페이트짱한테 줄 초콜렛, 크로노군은 에이미씨한테 줄 초콜렛."
"에이미한테?"
"응."

페이트는 나노하의 말을 듣자 뭔가 머릿속에서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복잡하진 않지만 단단하게 꼬여있던 실타래가 간단한 말 한마디로 풀려나간다.

"그게 크로노군. 누가 봐도 에이미씨를 좋아하고 있잖아? 그런데 정작 크로노군은 잘 모르는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힘좀 썼어!"

나노하는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양손을 옆구리에 올려놓으면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있었다. 어쩐지 콧김도 살짝 세진것 같은 기분.
페이트는 두눈을 껌뻑거리면서 나노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당하게 페이트를 바라보고 있는 나노하의 얼굴은 착한일 했으니까 칭찬해달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 같기도 했다.

바보 같았다. 겨우 이런일로 나노하를 오해해 버리다니. 혼자서 이상한 상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나노하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럽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나노하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져 갔다.
그렇게 생각하자 두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에? 페이트짱 울어? 왜그러는 거야?"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주위가 어떻던 간에 그저 마음가는 대로 눈앞의 사람을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건데. 그러면 틀림없이 대답을 해주는데.

두팔을 뻗어 나노하를 끌어앉았다.
나노하는 페이트의 행동에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얌전히 페이트의 품속에 들어갔다.

"정말로 괜찮아?"
"응, 괜찮아. 기뻐서 그러는 거야. 나노하가 정말로 좋아서."
"아.... 응.... 나도 페이트짱이 정말 좋아."

서로 껴앉은 둘의 얼굴은 똑같이 터질듯 빨갛게 변해 있었다.
터질듯한 얼굴은 웃음이 한가득.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after story~~~~~~~~~~~~~~~

 

 

 

"크로노군~!"
"아, 나노하."
"좋은아침. 어제 에이미씨한테 초콜렛 줬어?"
"응. 뭐.. 어떻게든 전해줬어."
"그래? 에이미씨 어땠어?"
"어떻긴... 뭐.. 좋아해 준거 같아."
"다행이다. 거봐, 내말 듣길 잘했지?"
".......... 그런거 같아. 저기, 고.. 고마워...."
"냐핫, 고맙긴 뭘. 이제부터는 에이미씨한테 좀더 잘해줘."
"노력하도록 할게. 저기 나노하."
"응?"
"이거 받아."
"뭔데?"
"연극 티켓. 2장이 들어왔는데 에이미가 본거라서."
"에? 하지만... 크로노군이라도 보면 되잖아?"
"난 그런 로맨스쪽은 별로 안좋아하니까. 게다가 이번에 나노하가 도와줬기도 하고. 그에 대한 보답이야."
"...... 응, 고마워. 페이트짱이랑 보러갈게."
"그래. 저, 저기..."
"왜?"
"내년 화이트... 데이때도.... 좀 도와... 줬으면... 좋겠..어....."
"응! 맡겨만줘!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테니까!!!"
"그, 그럼 난 이만!"
"안녕~ 크로노군! 에이미씨랑 힘내!"
"히, 힘내긴 뭘?! 그러는 너야말로 페이트랑 계속 친하게 지내줘."
"응, 고마워. 그럼 다음에 봐."
"아아, 그래. 다음에 보자."

by | 2011/03/21 15:36 | 소설이라 하긴 부끄럽지만 | 트랙백 | 덧글(0)

[나노하]-<present>- 07

-<present>-




 

"페이트짱, 다 됐어!"
"응, 갈게."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타이밍 좋게 나노하가 불렀다.

막 잠에서 일어나 멍해진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 씌우자 정신이 번쩍들고 잠이 싹 달아났다.
그렇게 맑아진 정신으로 샤워 속행. 나노하는 나보다 먼저 씻어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다가간 식탁 위에는 간단한 토스트와 샐러드, 그리고 우유가 각각 한컵씩.
쉽게 만들 수 있기에 자주 먹는 식단이었다.

서로 마주보며 앉아 식사 시작. 도중에 간간히 대화도 섞으면서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도중 거실에서 켜놓고 온 TV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자택에서 습격을 받아 숨졌습니다. 피해자는 상당히 권위있는 세포학의 연구자로..."

무미건조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일어난 사실만을 기계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거기엔 아무런 감흥도 감정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것만 있을뿐.

하워드씨의 일은 결국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언제까지고 숨길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번 습격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점에 더욱 충격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습격당한 피해자는 모두 자택이나 호텔등의 건물에서 습격받아 살해당했으며 이번 사건만이 사전에 범행 예고를 알려와.."

다른 습격사건 들도 알려져 버린것 같았다.
한계까지 숨기고 숨겼던 일이 하워드씨의 사건을 계기로 터져버린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알려질 일이었지만 하워드씨의 사건을 계기로 터져버렸다는 사실에 먹고있던 토스트가 맛없어져 버렸다.

 

 

 


바깥이 어둑어둑 해질 무렵 포워드진들의 훈련이 끝났다.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확실하게 실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꾸준한 노력만큼 자신을 키워가는 건 없으니까. 포워드진들은 언제나 열심이라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아진다. 성실하고 우수한 제자들이다.

"포워진들 돌보는게 상당히 즐거운가 보데?"

훈련이 끝나고 하루 일과가 끝나 피로해진 몸을 이끌고 복도를 걷고있는 도중 하야테를 만났다.
마음속 생각이 겉으로 나와 버렸는지 눈치빠른 친구는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아이들 성실하니까."

생각한 그대로를 시원스레 말해버리자 하야테는 '흐응~'거리며 미묘하게 웃고있었다.

"아, 하야테씨 여기있었네요. 마침 잘됬다."

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코너에서 샤리가 튀어나왔다.
팔에는 한아름 서류가 들려 있는걸 보면 방금전까지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나 보다. 이쪽도 성실하네.

"여기요. 하야테씨가 부탁하셨던 자료."
"오~ 벌써 끝냈나?"

자료라는 소리에 두눈을 형형히 빛내며 잽싸게 받아들고 있었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한장한장 넘기며 훑어보고 있는 모습은 척보기에도 엄청난 표정이었다. 이번 일로 꽤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업자득이지만.

"하워드씨에게서 별다른 특이점은 찾아볼 수 없었어요. 성격도 좋아서 인간관계 에서도 달리 트러블 같은건 찾아볼 수 없었고요. 오히려 고마워 하던 사람들이 많던걸요? 그래서 이번 사건으로 모두 침울해 하더라구요. 좋은 사람을 잃었다면서요. 근데 금방 '이러고 있으면 하워드씨가 싫어 하실 거야! 우오~ 힘내자~!' 라면서 다시 불타오르던데요."
"호오... 그거 대단한데?"

샤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좋은 말들 뿐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굉장한 발언이었다.
처음 하워드씨를 봤을 때 느낀 인상도 좋은 것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남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더욱 놀라웠다.

"그럼 가족들은?"
"네, 그것도 조사해 봤어요. 가족들도 이웃들한테 평판이 좋았습니다. 이쪽도 칭찬 일색이었어요. 그런데 한가지 이상했던 점은 6~7년 정도 전에 갑자기 집을 비웠다는 군요. 아무말 없이 2년 정도 사라졌다고 해요. 그러고는 또다시 갑자기 돌아왔다고 합니다."
"사라지고 돌아와?"

샤리의 보고에 하야테는 눈빛을 바꾸며 생각에 잠긴듯 했다.
아무래도 뭔가 걸리는게 있는지 분위기가 변해버렸다. 중요한 일을 할때 보이는 표정. 상사로서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야테, 가족들한텐 내가 갈래."
"페이트짱이?"
"응, 나하고도 상관있으니까 내가 가고 싶어."
"뭐,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럼!"
"어? 잠깐, 페이트짱!"

하야테의 허가가 떨어지자 마자 서둘러 복도를 뛰어갔다.
뒷편에서 다급하게 늦었으니 지금 가지 말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해버렸다.
지금 시간에 간다면 남의 집에 찾아가기에 상당히 늦은 시간이 된다는것 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것 보다도 가족들을 만나 사소한 것이라도 알아내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빨리 알아내서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다. 의문을 풀어내고 싶다. 하워드씨의 뜻을 알고 싶다. 모두가 나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마음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움직이는 발걸음을 멈출 수 가 없었다. 그만큼 나의 마음은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하워드씨의 가족들에게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가한 시골같은 마을에 도착했을 땐 이미 태양은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지 오래로 달님이 머리 위에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가려진곳 없이 동그란 모양은 밝기를 배가 시켜주어 달의 매력이 은은한 빛에 있다면 그런 매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너무나 강하고 환한 빛이었다. 덕분에 모두가 집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낼 시간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주위가 환했다.

집은 아담한 분위기의 주택이었다.
아담하다고 해서 결코 서민적이었던건 아니었지만 주위와 겉돌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품을 나타내듯 우아하지만 유난스럽지 않고 화려하지만 자랑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의 훌륭한 일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것 같았다.

낮게 둘러져 있는 울타리와 이어져 있는 문 한구석에 있는 초인종을 울렸다.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고 약간의 정적 뒤에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구시죠."
"밤늦게 죄송합니다. 저는 페이트·T·하라오운이라 합니다."
"페이트... 씨..?"

나의 이름을 듣자 스피커 넘어로 낮게 되뇌이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중얼거린 소리는 곧바로 허공에 사라져 갔지만 옅은 소리에서 스피커 넘어의 사람이 생각에 빠졌단걸 느꼈다.

"다니르 로 하워드씨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면 안될까요."

하워드씨의 이름을 말하자 마자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무리도 아니다. 아직 슬픔에서 빠져나오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차분히 감정을 제어하고 있는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스피커 넘어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목소리에 떨림이 남아 있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구겨진 인상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선 집안은 고요하고 차분했다.
집안을 메우고 있는 연약한 빛은 강하지 않아 어두운 밤을 조용히 보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누구 오셨나요?"

집안에 들어서자 거실을 지나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복도에 빼꼼히 얼굴만 내밀고는 이쪽을 살펴보는 남자아이가 한명 보였다.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해서 귀엽고 여려 보였는데 이제 곧 잘 모양이었는지 옷차림새가 잠옷이었다. 소매에 그려진 곰모양 무늬가 아이의 천진함을 돋보이게 했다.

"티엔, 아빠 친구분이시란다. 인사드리렴."

티엔이라 불린 남자아이는 아빠라는 말을 듣자 표정이 어두워 졌다. 고개를 푹 숙이며 쭈뼛쭈뼛 다가와 두손을 마주잡고 앞에 섰다.

"안녕.. 하세요..."
"안녕? 귀엽게 생겼네. 이제 자러 가는 거니?"
"네."

생긋 웃으며 말한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티엔은 어색하지만 눈을 가늘게 하며 웃고 있었다.
티엔의 나이에 맞는 수줍은 미소였다.

"페이트씨는 엄마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 티엔은 이만 가서 잘래?"
"응, 알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공손히 고개숙이며 후다닥 복도 건너편으로 사라져 갔다.
부끄러운듯 했던 뒷모습은 보기에도 흐믓해질 정도로 순수해 보였다.

"그럼 편하게 앉으세요."

티엔이 사라지고 난 후 서로 마주보며 앉았다.
소파는 낡은 감이 있었지만 소중하게 썼는지 불편함 없이 오래된 물건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페이트씨께서 물어보고 싶으신 것이 무엇인가요?"

자리에 앉아 한번의 심호흡을 하고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킬때 부인께서 물어왔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 앞으로 자신이 말해야 할것이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나와 똑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무릎위에 마주잡은 두 손이 아까부터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충분히 느껴졌다.

"그전에 사과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사과요?"
"하워드씨를 경호했던건 접니다. 그때 하워드씨를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남에게 고개숙이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듯 자연스러운 기분. 오히려 자애로운 누군가에게 고해하듯 평화롭고 평온해지는 마음 이었다.

"괜찮아요. 페이트씨가 그렇게 까지 고개 숙이시지 않으셔도 되요. 페이트씨 잘못이 아니니까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웃고있음이 느껴졌다. 분노나 격정같은건 없었다. 슬픔이 묻어나올 뿐. 조용히 가슴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슬픔.

고개를 들고 제자리에 앉자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페이트씨는 남편의 부탁을 들어준것 뿐이잖아요?"

부인의 입에서 나온 부탁은 어떤걸 말하는 걸까.
경호일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습격자가 나타났을때의 부탁을 말하는 걸까.
그리고 난 하워드씨의 부탁을 제대로 들어준 건지 잘 모르겠다. 들어 준 것일까. 들어준게 옳은 것이었을까.

"남편은 마지막에 어떻게 있었나요?"

조심스레 건네오는 질문에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옅게 빛나는 달빛. 달빛에 비추어진 방.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조각. 넓어져 가는 붉은 웅덩이. 힘없이 늘어진 몸.

작아져 가는 숨소리. 소리가 되지 못한 말소리. 그리고 그속에서 웃고 있던 얼굴.

"웃고 계셨습니다. 편안하고 부드럽게."

도저히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몸이 꿰뚫리는 아픔속에서 그는 미소지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저주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모든걸 받아들이듯이.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자신이 그렇게 되는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가요. 남편은 자신의 바람대로 떠나갔군요."
"네? 바람이라니, 그게 무슨─"

띵동────

부인의 말에 궁금증을 느껴 되물으려는 찰나에 현관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타인의 방문을 알리는 소리에 부인은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문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왔다는 점과 스피커 넘어로 들려오는 소리로 여성이라는 점만 알뿐이었다.
내가 말하긴 그렇지만 지금 시간에 남의 집에 오는걸 보면 조금 특이한 사람이 아닐까.
나하고 얘기했을 때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지난뒤에 대화는 종료되고 곧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온 손님은 정중히 인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사하는 목소리에 위화감을 느꼈다.
최근에 어디선가 들어본것 같은 낯익은 목소리. 대화 톤이나 방법은 달랐지만 좋은 인상을 주는 목소리.

소파 뒤로 고개를 돌리며 일어나 누가 들어오는지 살펴보았다.
현관으로 통하는 코너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건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흔들며 들어오는 깔끔한 이목구비의 붉은 눈의 소녀.

"린.......?"
"페이트....... 씨...."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건 린 클리어 였다.

 

 

 

"이거 지루하구만."

아까부터 전혀 변하지 않는 경치에 비타는 숨기지 않고 하품을 하며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예전부터 주의를 줬지만 전혀 고쳐지지 않는다. 설교나 늘어놓는 다고 짜증만 부릴뿐.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왔지만 여전히 어린애다.

"비타, 그런 행동은 삼가라. 볼품 없다."
"흥, 시끄러. 그러는 시그넘은 고상해서 좋겠네."

역시나 이번에도 비아냥대며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저런점은 빨리 고쳐야 할텐데. 저렇게 행동하니 항상 오해받는 거다.

지금 나와 비타가 가는 곳은 야생동물이 습격당한 현장.
이후에도 야생동물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지금으로선 라이프의 단서가 이것 정도밖에 없어 상당히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도착할 때마다 범인은 이미 도망친 후라 제대로된 수확이 없었다. 애초에 우리쪽의 감시에 걸리지 않는것 자체가 이상했다. 살해당한 동물을 조사해 동물의 습격시간을 봤을때 그시간에 생명반응을 이용한 탐색을 하고 있었는데도 야생동물 이외의 생명체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범행을 저지르고 사라졌는지 의문이다. 범인이 인간이 아니기라도 하단 말인가.

"응? 잠깐만, 시그넘."

비행하는 도중 비타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날아가길 멈추고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따라 바라보자 모래언덕 넘어 사람이 공중에 떠있는것이 보였다.

"헤헷, 드디어 걸리셨군!"
"잠깐, 비타!"

비타는 말릴세도 없이 공중에 있는 사람에게로 날아갔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가면 안되는데.
이곳에 있는건 수상하지만 일전 전투를 벌였던 습격자와 외관정보가 일치하지 않았다.
망토를 두른것도 아니고, 검은색의 검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비타, 전의 습격자하고 차림새가 일치하지 않는다. 일단 누군지 알아보는게."
'그렇게 우물쭈물 하다간 범인한명 못잡는다고. 시그넘은 거기 가만히 있어.'

독불장군처럼 혼자 저돌적으로 전진하는 비타를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Schwalbe fliegen"

햄머 폼으로 변한 그라프 아이젠이 언제나와 변함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라프 아이젠이 한순간 빛에 감싸이고 삼각형의 붉은 마법진 위에 서있던 비타는 손가락 사이사이에 철구를 끼워 하늘높이 던지고 있었다.
호쾌하게 휘둘러진 그라프 아이젠에 정확히 명중해 철구는 굉장한 속도로 뻗어나갔다.

공중에 떠있던 사람은 방심하고 있었는지 비타가 행한 공격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로 땅 위의 어느 지점을 응시하고 있다가 날아오는 철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받혀버렸다.

피격된 사람은 땅위로 곤두박질 쳐지며 모래먼지가 자욱하게 깔렸다.
피어오르는 모래먼지속에서 상대방을 자세히 보기란 힘들었다.
눈을 찡그리며 먼지속을 주시하고 있자 검은색 그림자가 순식간에 움직이더니 이윽고 먼지를 뚫고 나와 환한 하늘 한가운데에 멈춰섰다.

"큿, 명중된게 아니었나?"

비타는 분한지 이를 악물며 신음하고 있었다.

공중에 올라온 사람은 남자였다. 남자라고 하기보단 소년에 어울리는 외모. 아직 엣되보이는 얼굴은 곤란한지 찡그려져 있었다. 그런 소년의 옷은 이곳저곳 찢어져 너덜해 있었지만 큰 상처는 없어보였다.

"이번엔 놓치지 않아! 테트리히 슈라크!"

비타는 또다시 주위상황을 보지않고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년도 당황했는지 잠시 허우적거리다 두팔을 교차하며 들어올려 웅크리는 자세를 취했다.

비타가 휘두른 그라프 아이젠에 또다시 공격당해 소년은 다시한번 모래바닥으로 처박혔다.
날아간 소년쪽으로 다가가자 처박힌 소년이 도망가기 위해 하늘로 날아오르는게 보였다.
이번 공격도 크게 유효하진 않았나보다. 비타가 짜증내겠군.

소년은 공중에서 다시한번 자세를 잡고 비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잠깐."

소년보다 먼저 소년이 날아갈 자리에 자리잡아 그를 불러 세웠다.
소년은 나의 외침에 반응을 보이며 도망가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대 유물 관리부 기동 6과의 시그넘이다. 잠깐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있다. 동행해 줄 수 있겠나?"
"기동.... 6..... 과....?"

내가 누군지를 알리는 문장을 듣자 지긋이 바라보고는 소년은 그속의 한 단어를 되뇌었다.

 

 


"야가 그아이?"

철제문을 밀며 나타난 주인 하야테는 의자에 앉아있는 소년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씀하셨다.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는 눈빛은 훌륭히 자신의 위치에 걸맞는 형태를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무슨 잘못을 했데?"
"아뇨. 그런건 아닙니다. 저 소년이 야생동물 습격사건으로 출입이 통제된 곳에 있어 데려온것 입니다."
"흐음....."

아직 자세히 조사한건 아니지만 지금 이순간 까지는 소년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잡혀온건 아니었다.
그저 위험지역으로 통제된 행성에 있어 취조차 데려왔을 뿐. 그것만으로도 잘못한거긴 하지만 주인이 말하시는 잘못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근데 와 저렇게 옷이 너덜해졌나?"
"아, 그건 비타가..."

주인의 물음에 방 한구석에서 발을 툭툭거리며 딴짓을 하던 비타가 움찔 몸을 떨었다.

"비타, 또 막 달려든기가? 내가 그렇게 하지 말랬지."
"우으.. 미안 하야테."

주인께서 이곳에 처음 왔을때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눈매로 비타를 쳐다보자 비타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 들었다. 비타가 저 버릇을 고치려면 한번 크게 혼나봐야 할텐데.

"미안하데. 옷은 이따가 한벌 줄게."
"아, 아뇨. 괜찮아요."
"신경쓰지 말아라. 옷을 그렇게 만든건 책임을 져야제."

비타에게 보였을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해맑게 웃으시며 주인은 말씀하셨다.

"어째서 그 행성에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주인의 물음에 소년은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손끝을 만지며 짧은 시간을 보낸뒤 드디어 달싹거리며 입을 움직였다.

"저기, 죄송하지만 나노하씨좀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by | 2010/01/30 00:39 | 소설이라 하긴 부끄럽지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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